나의 부친은 박대통령의 기술자 우대 정책으로 기술을 배워야 장차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정확하게 들은바는 없지만 암묵적으로 대학교 보낼 돈이 없으니 공업고등학교를 
가서 기능직으로 사는게 바른 길이라는 정신무장이 되어 있었다.
평택기계공업고등학교 선반과를 선택해서 다녔지만 지금 생각해도 나는 기계 보다는
예술계통에 더 어울리는 태생으로 쇠덩어리와 친해지기 무척 어려워 했던것으로 기억된다.

공작기계 선반


아무튼 어찌어찌해서 선반 자격증은 획득을 했고 졸업시즌이자 취업시즌 1이 다가오자 아버님이 
동네사람에게 부탁해 안성공단의 오리엔탈이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되었다.
그곳에 첫출근날 맨붕이 오고 말았다. 낚시대를 만드는 회사로 기억이 되는데 여자분이
오더니 아주 작은 부품을 안전장치인 덮개도 없는 그라인더에 맨손으로 잡고 갈아내는
작업을 지시했다. 겁많은 나로서는 손가락이 없어질거 같다는 공포심으로 다닐수 없다고
불안한 마음을 이야기 하고 바로 그만두고 말았다.
취업시즌 2는 아버님이 나를 부평에 있는 자동차 엑슬 제조 회사 코라아스파이서에 취업을 
시키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하셨다.
그 회사에 나에게 형님벌 학렬인 인척이 상무로 있었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시는
아버지는 대단한 결심으로 그분을 찾아가 부탁을 하였으나 군복무 대신의 공장생활은 할수 없었다.
제대후 아버지는 다시 그 형님에게 부탁을 하시고 잘 안될경우에는 화도 내시고 하시면서
기어코 나를 코리아 스파이서에 입사 시키셨다.
그당시 개봉동에서 미어터지는 전철을 타고 부평역에서 내려 버스로 삼산동 공장까지 출퇴근을
하였는데 나는 자동차 부품인 프로펠라 라인에 배정이 되었다.
나의 선임은 강동휘라는 분인데 키가 크고 인상이 좋았고 그의 형님은 노조활동을 하면서같은 
라인의 다른조에서 연마기 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강선배에게  한번에 여러개의 구멍을 뚫는 멀티드릴 머쉰이라는 장비의 사용법을 배우고 
공장생활을 이어 가던중 문제가 발생 했다.
쇠에 구멍뚫는 작업을 하려면 쇠부스러기의 파편과 거기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하여 
절삭유라는 것을 사용 하는데 그것이 독한지 나에게 기름독이 생겼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가려워 잠을 잘수가 없어 그렇치 않아도 힘든 공장생활이 지옥과
같았다.
피부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그때뿐이고 다시 재발을 반복 했다.
그러던중 나의 주임무가 강선배가 다른곳으로 가면서 멀티 드릴에서 연마 작업으로 변경이 되었으나
절삭유에 의한 기름독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아버님에게는 큰 실망감을 드릴수 밖에 없었지만 2년여를 다닌후 그곳을 퇴사 하기로 하였다.
물론 그곳에서는 맘에 맞는 김영선 선배라는 분도 만나서 즐거운 생활이 있었지만 가려워
잠을 못자고 위험한 공작기계 앞에서 철야작업을 하는것은 내 목숨을 갉아 먹는 행동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젊은날 가려워 잠을 못자는 지옥같은 공장 생활 이었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고 보니 가끔   
그시절이 떠오른다.
떠올린 김에 인터넷에 코리아스파이서 라고 조회를 해보니 검색자료가 없다고 한다.
더 상세히 찾아보니 2002년에 다이모스라는 회사에 합병 되었고 2019년에 현대트랜시스라는
회사로 다시 이름이 변경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평 삼산동 공장이 있던 자리는 현대계열 다이모스에 의해 엠코타운이라는 택지지구로 개발
되었다고 하니 추억의 장소는 다시는 볼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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