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 규(奎) 시호(諡號) 광정공 고려의 왕권을 재확립 시키는데 제일의 공신이다. 벽상삼한삼중대광 광정대부 상의첨의감사. 국혼으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익주(唐城)을 남양부로 승격 공 의식읍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양홍씨가 되었다. 자: 장간공 휘 융(戎), 여 (충선 왕비, 충숙왕비)
얼마전부터 SNS를 통해 시제에 참석하여 줄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계속 전달되어 왔습니다. 같은 지역에 사시는 당숙 아저씨께 연락해 보니 선약이 있어 가실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말에는 늦잠을 자고 싶다는 욕망이 대단했지만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8시에 진천을 향해 출발 했습니다. 고속도로 용인 부근에서 잠시 밀렸을뿐 제시간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우선 실원리 초입에 있는 할아버님,아버님 묘소에 들러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님 묘소는 떼가 살지를 않고 아버님 산소에는 쑥과 칡이 제거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년 봄에는 다시한번 근사미 작업을 해야 겠습니다. 시제장소에는 아직 일러서인지 많은 분이 도착해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번 손님처럼 왔다 가지 말자고 생각을 바꾸고 만나는 분들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드리려고 노력 했습니다.
오산 아저씨와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안이라도 한분씩 사귀어 놓으면 좋을거 같아 옆에 계신 분과 연락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시제를 마치고 선수촌 근처 고기집에서 종친회에 참석 했습니다. 그동안 종친회를 이끌던 집행부가 임기를 마치고 활동적인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 하였습니다.
처음 참석한 종친회에 젊은 사람은 별고 없고 나이든 분들만 대다수 이니 문제가 아닐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양홍씨 시조] (선 시조 10세) 몽주의 자 태사공(太史公) 홍 은열(洪殷悅)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 시조로 모셔 두고, 태조 왕건이 고려 개국할 때 개국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직접 은열이란 이름을 하 사받았으며 고려 광익경제공신, 정1품 삼중대광과 태사의 자리에 올 랐다. 시조는 삼중대광(현 국무총리), 태사로 전하는 은열이다. “홍 은열을 일 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로 손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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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 공(홍 은열)의 6대손 충평공 관(灌)은 고려의 제1의 충신이자 명필 로서 보문각 태학사로 경학을 강론하신 탁월한 철학자이시다. 충평 공관의 5대손 광정공 규(奎)께서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 왕권 1237년(고종24)~1306(충렬왕32) 홍자번 자 는, 운지 시호는, 충정/동지밀직 예의 아들, 문과에 급제, 남경유수, 판관을 거쳐, 광주통판, 충청, 경상, 전라안찰사, 호부시랑을 거쳐 1271년(원종 12)우부승선이 되어 왕에게 서정을 친히 보살필 것을 청했다. 1278년 지밀직사사가 되어 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로서 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원나라와 일본정벌 을 위한 전함의 수조을 담당했다. 1280년 지첨의부사, 세자 이사, 1284년 첨의찬성사, 1293(충렬왕19)왕이 원나라로 갈 때 서울을 유 수했다. 첨의중찬, 1295년 지도첨의사가 되었다가 이해 첨의중찬으 로 치사했다. 이듬해 상의도첨의사사에 이어 중찬으로 편민십팔사를 왕에게 조진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좌복야, 참지광정원사를 거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조사가 되었다. 충렬왕 이 복위하자 공신의 호를 받고 1300년(충렬왕26) 판중군사가 더해졌 으며, 1303년 충렬,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킨 오기, 석천보를 잡아서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이해 도첨의 좌중찬이 되었다. 1305년(충렬왕31)경흥군, 자의도편의사사가 되어 원나라에 가는 왕을 호종, 이때 왕유소, 송민 등이 충성왕의 측근에 서 갖은 흉모로써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두 왕을 모시고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봉되고,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광정 공은 두 따님(충선왕비, 충숙왕비)의 국혼으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익주를 남양부로 승격 공의 식읍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 양 홍 씨가 되었다. 이후 고려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조가 들어설 때 잠시 큰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태조가 큰 뜻 을 이룬 후에는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교로서 태사공 의 후손은 누구나 다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 일에 부 릴 수 없도록 엄한 명을 내렸다. 이는 역대 조정에서 추인한 바다. 훌륭하신 선조님 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후손들과 유대가 돈독하여 주변의 으뜸으로 번성해 10대 명벌로 자리매김해왔다.
가을을 맞아 강원도 평창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금요일 아침부터 출발하면 좋겠지만 모두 사정이 있어 저녁이 다돼서야 출발을 할수 밖에 없었다. 배고품을 참고 달리다 여주 휴게소에서 각자 취향대로 저녁을 해결했다. 8시가 다돼서 평창 라마다호텔에 도착 했다.
주차장은 만차라 한가한 길가에 주차를 했다. 숙소는 색다르게 지하 1층 이었다. 편의점 음식점 호프가게등을 지나 게스트룸으로 들어서니 노란색으로 전체가 칠해져 있다. 원장님이 숙소를 정할때 4인실이라고 했는데 4인실은 어린이들이 머물수 있는 룸이었다. 숙소도 동물인형과 그림이 있고 복층에는 어린이용 테이블이 있었다.
설맥에서 시원한 맥주와 코리안 시리즈를 대형화면으로 보면서 가족간 밀린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에 들른 사우나는 넓고 깨끗했다. 무엇보다도 좋은건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데 있었다. 호텔 조식을 먹고 퇴실을 하면서 뒷마당에 있는 그네에서 대관령 산자락을 바라다 보았다.
대관령 양떼목장 초입에서 울타리 높이뛰기를 하는 양을 보고 조금 더올라 양떼들이 풀을 뜯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다 보았다. 그러다 울타리 옆에 사람이 만지는걸 즐기는 양의 털깊이를 재보니 손가락 두마디가 들어갔다. 내려오면서 양치기견 깜순이를 보았는데 사람손이 얼마나 탔는지 사람손을 자기발로 누르며 만져주기를 강요하더라
단풍도 볼겸 오대산 월정사로 향하는데 사람생각은 다 같은지 차가 무척이나 밀리고 있다. 도로변에는 군데군데 농산물을 팔고 있었다. 월정사 입구에서 차량 주차비용을 받으면서 하는말이 주차장이 만차니 알아서 주차하란다. 허걱 이럴거면 주차비를 받지 말아야 하는거 아닐까 월정사에서 부처님께 기도도 하고 가족소원등도 달았다.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월정사에는 공사와 사람들이 많아 무척 붐볐는데 고즈넉한 사찰을 기대한 나는 당황스러웠고 사찰이 곳곳마다 과하게 상업화하는것 같아 씁슬한 마음이 들었다 월정사를 뒤로 하고 늦은 저녁으로 평창한우마을에서 소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신라시대 문무왕때 당성백, 효소왕때 당성후를 지냈으며, 그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남양으로 정한 남양홍씨들에 의해 흙을 쌓아 축성된 산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 시대 때 당항성으로 지칭되었다. "당성"이란 명칭은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면서, 남진 정책으로 화성 일대가 고구려에 속하면서 당성군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51년에 신라 시대 진흥왕이 757년에 '당은군'으로, 829년에 군사적 거점으로 '당성진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전쟁기와 통일신라 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항성은 신라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결정적인 문화의 창구 기능을 하게 되며, 신라가 막대한 군사적 비용과 백제와의 맹약을 깨뜨리면서 이곳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라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이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 할 정도로 삼국시대 역사의 무대에서 당항성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무역항인 당항성을 통해 드나들었던 선진문물 중에서 당의 불교 문화는 중요한 전래요소다.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당성은 1,993년에 지표 조사가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1,998년과 2,000년에 2차에 걸쳐 발굴 조사로 화성 당성이 1차 성과 2차 성의 복합 산성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의 1차 산성은 산이 정상을 중심으로 쌓는 태뫼식 산성이고, 통일신라 시대 에 축조된 2차 성은 계곡부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지금까지 6 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당성에서는 명문 기와, 토 제만등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성 발굴은 지금도 진행 중이 며,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로 보자면, 당항성은 화성시 남양에 있는 당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현재 남양에 있는 당성은 바로 당항성 내의 군사적 보호 시설로서 축조된 성이 틀림없다. 현재는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 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 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 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현재는 화성시에 속하지만,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백제 시대 당항성에서 현재 화성 당성으로 25회나 바뀌었다. ※(당성→화성 당성) 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종목 : 국가사적 문화재 217호[당성 및 사적비] 지정되어있다.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 국방 / 성 / 성곽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삼만리 산32번지. 출처 : 한국민속문화 대백과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성시 "남양, 당성의 유래 한국 문화유산청 홈페이지 참조.
남양홍씨 본관은 옛 수원화성 남양 (현재 화성시 남양읍) 고구려 27대 영류왕 (재위 618-642)이 당나라에 공자 맹자와 같은 훌륭한 덕예 문학의 선비파견 요청함에, 당나라 태종께서 문화 사절 당 학사 8명을 파견했는 데, 그중에 한 분이 선 시조 홍천하(洪天河)님이시다.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정의를 논하는 학문으 로 유교보다는 넓은 범의) 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하며 정착한 곳이 당성(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사적 217호) 이다. 그 후 연개소문의 난을 당하여 신라국 지리산 덕산동으로 피신하여 신라 선덕 여왕 때 홍 학사는 유학발전에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 큰 덕으로 덕산 촌주에 명하고 국사로 예우했다. 문무 왕 때 당성 백에 봉 해지고, 신무왕 때 태자태사로 추대했으며, 효소왕은 당성 후로 삼았다. 그 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되니 후손들이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번성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당성 홍 씨는 신라 귀족의 반열에 서서 문무 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양 유생통문 이라는 글을 보면 "신라오주가 학사 공을 스승으 로 받들고 교화를 보급한지 50여년 만에 정교는 성행하고 후학은 대통하 였다. 김유신 임강수 설총 김총수 등이 선생의 후학들이며 공자묘를 창설 하였다"고 하였으며, 목은 이색은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예악, 시, 서 (예법과 음악, 시와 글씨)의 발전으로 많은 군자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공자라 할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십재명벌로 손꼽혔다. [남양대보(南陽大譜), 한국씨족연구회 참조]
몇년전부터 제천에 오면 냇가에서 노는거 외에 할수있는 액티비티 활동이 뭐가 있을가를 살펴보다 모노레일과 케이블카 그리고 페러글라이딩이 있다는걸 알았다. 페러글라이딩은 무리라고 여겨져 제외하고 케이블카는 너무 순간적으로 휘익하고 올라가서 활동성에서는 낙제점이다. 그럼 남는건 모노레일이다. 하지만 모노레일은 인터넷으로 예약하지 않을경우 현장에서 거의 탈수 없다고 했다. 제천에서 출발하면서 무더위니 탈수 있겠지 하며 40여분을 달려 갔다.
뜨거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더위에도 불구하고 티켓팅을 하려는 사람들이 꽤나 줄을 서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으나 다행으로 표를 구할수 있었다. 12시 30분이다 아직 2시간 30여분이 남아 있다. 너무 더워 차를 타고 충주호 길을 따라 둘러보다 되돌아나와 두부전문점인 사과나무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시원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데 옆에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분들이 계시더라 가족 같은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분은 통통녀 짧은 원피스다. 매표소 앞에서 봤는데 이곳에서 2번째로 마주쳤다.
같이간 형님이 사과 막걸리를 주문해 마시면서 맛만 보라고 따라 줬는데 달착지근하니 마시다 보면 정신을 잃을것 같다. 담백한 맛과 칼칼한 맛 순두부 찌게를 주문 했고
연달아 나오면서 서빙 아줌마가 내가 남겨논 막걸리 종이컵을 쳐서 내옷위로 쏟아 버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안하는데 내 겉옷을 가지고 밖에나가 털어가 지고 들어왔다. 그렇게 소동이 가라 앉는듯 했으나 이번에는 두부찌게 가스렌지가 버너가 아닌 가스통 체결하는곳에서 불길이 올라왔다. 모두 깜짝 놀라 허둥지둥 하는데 원장님이 물을 부어 불길을 잡았다. 놀란 마음에 주인장에게 낡은 휴대용 가스렌지를 교체좀 하시라고 몇번에 걸쳐 말을 했으나 들은체 만체다. 더 말하다간 우리가 진상 고객이 될듯 싶다. 점심을 먹고서도 시간이 남아 매표소앞 커피숍에서 눈꽃빙수를 먹고 모노레일 승강장으로 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무더위에 모노레일도 고장으로 연착해서 20여분이 지연 됐는데 말입니다.
에어콘도 없는 난달에서 그냥 대책 없이 50여분을 기다리자니 참 한심하기 그지 없더란 말입니다. 그러다 탄 모노레일은 너무 느려서 재미 없겠다 했는데 천천히 갈땐 주변에 널린 영지 버섯과 산초나무를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것도 재미 있었다.
그러다 45도 급경사에서는 목이 뒤로넘어 갈거 같은데 처형이 예전에 어머님과 와서 급경사에서 모노레일이 멈춰 어머니 목을 받치고 있었다는 경험담을 이야기 하며 그때의 급박함을 실감나게 몸으로 재현해서 한바탕 웃었다. 500미터 비봉산 정상에서는 냉커피를 마시고 충주호 주변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우리는 누군가 전망대 유리에 기대지 마시오의 글자를 변조해서 대마 / 기대마시 라고 해놓은 것을 보고 이건 일본말인가요라며 한바탕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통통녀 짧은 원피스를 4번째로 보았다. 만약에 영동고속도로에서 한번더 만난다면 그것도 인연이니 통성명을 해야 할듯 하다. 하산용 모노레일을 기다리는데 그 앞에선 담대한 청년들이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하고 있었다.
매년 제천에서의 여름 휴가는 그냥 냇가에서 발담그고 있었는데 올해는 무더위임에도 불구하고 모노레일을 타는 새로운 경험을 해서인지 꽤나 즐겁고 유쾌했다.
7월말 8월초 원장님의 휴가 기간이다. 딸들은 스캐쥴이 따로 다 있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작년에 이어 제천에 있는 손윗동서네 별장에가서 피래미 낚시를 하기로 하였다. 출발하기전 잔기적떡, 삼겹살을 구매 했다. 콩물은 물량이 떨어져 살수가 없었다. 하양이를 타고 출발 했는데 네비가 영동고속도로를 바로 타지 않고 용인까지는 국도로 안내한다. 휴가철이라 고속도로에 차량이 많을것이다. 역시나 고속도로는 저속으로 가고 있다.
신림 농협에서 과일을 사려고했으니 집에 다 있다고하여 그냥 차를 몰아 갔다.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나니 전국이 폭염상태이다. 이곳도 예외일수는 없다.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처형이 정성스럽게 준비해준 낚시대를 메고 냇가로 향했다. 자신감있게 낚시대를 냇가에 담갔으나 처음 2마리가 잡힌것외에는 입질이 전혀없다. 그리고 자꾸 낚시 바늘이 엉켜서 그걸 푸느라 다쳤던 왼쪽 검지에 통증이 있고 붓기 시작한다. 분하지만 돌틈에 앉아서 원장님이 낚시하는걸 바라보고 있는데 왠걸 줄줄이 피래미를 낚고 있다.
아...나에게서 올해는 어신이 떠나간 모양이다. 원장님과 처형이 잡은 피래미를 손질해 집에가져와 씨래기와 방아잎을 넣고 매운탕을 끓였다. 방아잎 향이 쎈것을 걱정했으나 간을 맞추니 달착지근 매콤한 매운탕이 먹을만 하다
매년 느끼는거지만 귀찮을 만도 한데 언제나 두팔벌려 환영해 주고 같이 놀아 주는 처형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덕분에 올해도 시원한 냇가에 발을 담그고 매운탕을 먹으며 보낼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