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 시조] (선 시조 10세) 몽주의 자 태사공(太史公) 
홍 은열(洪殷悅)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 시조로 모셔 두고, 
태조 왕건이 고려 개국할 때 개국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직접 은열이란 이름을 하 사받았으며 
고려 광익경제공신, 정1품 삼중대광과 태사의 자리에 올 랐다. 
시조는 삼중대광(현 국무총리), 태사로 전하는 은열이다. 
“홍 은열을 일 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로 손꼽혔다. 

참조 이미지

태사 공(홍 은열)의 6대손 충평공 관(灌)은 고려의 제1의 충신이자 
명필 로서 보문각 태학사로 경학을 강론하신 탁월한 철학자이시다. 
충평 공관의 5대손 광정공 규(奎)께서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 왕권 1237년(고종24)~1306(충렬왕32) 홍자번 자 는, 
운지 시호는, 충정/동지밀직 예의 아들, 문과에 급제, 
남경유수, 판관을 거쳐, 광주통판, 충청, 경상, 전라안찰사, 
호부시랑을 거쳐 1271년(원종 12)우부승선이 되어 왕에게 
서정을 친히 보살필 것을 청했다. 
1278년 지밀직사사가 되어 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로서 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원나라와 일본정벌 을 위한 전함의 수조을 담당했다. 
1280년 지첨의부사, 세자 이사, 1284년 첨의찬성사, 
1293(충렬왕19)왕이 원나라로 갈 때 서울을 유 수했다. 
첨의중찬, 1295년 지도첨의사가 되었다가 이해 첨의중찬으 로 치사했다. 
이듬해 상의도첨의사사에 이어 중찬으로 편민십팔사를 왕에게 조진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좌복야, 참지광정원사를 거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조사가 되었다. 
충렬왕 이 복위하자 공신의 호를 받고 1300년(충렬왕26) 판중군사가 더해졌 으며, 
1303년 충렬,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킨 오기, 석천보를 잡아서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이해 도첨의 좌중찬이 되었다. 1305년(충렬왕31)경흥군, 
자의도편의사사가 되어 원나라에 가는 왕을 호종, 
이때 왕유소, 송민 등이 충성왕의 측근에 서 갖은 흉모로써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두 왕을 모시고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봉되고,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광정 공은 두 따님(충선왕비, 충숙왕비)의 국혼으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익주를 남양부로 승격 공의 식읍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 양 홍 씨가 되었다. 
이후 고려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조가 들어설 때 
잠시 큰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태조가 큰 뜻 을 이룬 후에는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교로서 태사공 의 후손은 누구나 다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 일에 부 릴 수 없도록 엄한 명을 내렸다. 
이는 역대 조정에서 추인한 바다. 훌륭하신 선조님 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후손들과 유대가 돈독하여 주변의 으뜸으로 번성해 
10대 명벌로 자리매김해왔다.


[조선실록, 남양대보, 씨족공원 세덕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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