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당성은 삼국시대 처음 축성된 산성이다.
홍천하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성에 정착하고,
신라시대 문무왕때 당성백, 효소왕때 당성후를 지냈으며,
그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남양으로 정한
남양홍씨들에 의해 흙을 쌓아 축성된 산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 시대 때 당항성으로 지칭되었다.
"당성"이란 명칭은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면서,
남진 정책으로 화성 일대가 고구려에 속하면서
당성군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51년에 신라 시대 진흥왕이 757년에 '당은군'으로,
829년에 군사적 거점으로 '당성진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전쟁기와 통일신라 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항성은 신라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결정적인 문화의 창구 기능을 하게 되며,
신라가 막대한 군사적 비용과 백제와의 맹약을 깨뜨리면서
이곳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라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이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 할 정도로 삼국시대 역사의 무대에서 당항성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무역항인 당항성을 통해 드나들었던 선진문물 중에서 당의 불교 문화는 중요한 전래요소다.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당성은 1,993년에 지표 조사가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1,998년과
2,000년에 2차에 걸쳐 발굴 조사로 화성 당성이 1차 성과 2차 성의 복합 산성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의 1차 산성은 산이 정상을 중심으로 쌓는 태뫼식 산성이고,
통일신라 시대 에 축조된 2차 성은 계곡부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지금까지 6 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당성에서는 명문 기와, 토 제만등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성 발굴은 지금도 진행 중이 며,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로 보자면,
당항성은 화성시 남양에 있는 당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현재 남양에 있는 당성은 바로 당항성 내의 군사적 보호 시설로서 축조된 성이 틀림없다.
현재는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 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 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 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현재는 화성시에 속하지만,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백제 시대 당항성에서 현재 화성 당성으로 25회나 바뀌었다.
※(당성→화성 당성) 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종목 : 국가사적 문화재 217호[당성 및 사적비] 지정되어있다.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 국방 / 성 / 성곽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삼만리 산32번지.
출처 : 한국민속문화 대백과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성시 "남양, 당성의 유래 한국 문화유산청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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