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홍씨 본관은 옛 수원화성 남양 (현재 화성시 남양읍) 
고구려 27대 영류왕 (재위 618-642)이 당나라에 공자 맹자와 
같은 훌륭한 덕예 문학의 선비파견 요청함에, 
당나라 태종께서 문화 사절 당 학사 8명을 파견했는 데, 
그중에 한 분이 선 시조 홍천하(洪天河)님이시다. 

STB 상생방송 참조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정의를 논하는 학문으 로 유교보다는 넓은 범의)
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하며 정착한 곳이 
당성(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사적 217호) 이다.
그 후 연개소문의 난을 당하여 신라국 지리산 덕산동으로 피신하여 
신라 선덕 여왕 때 홍 학사는 유학발전에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 
큰 덕으로 덕산 촌주에 명하고 국사로 예우했다. 
문무 왕 때 당성 백에 봉 해지고, 신무왕 때 태자태사로 추대했으며, 
효소왕은 당성 후로 삼았다. 
그 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되니 후손들이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번성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당성 홍 씨는 신라 귀족의 반열에 서서 문무 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양 유생통문 이라는 글을 보면
"신라오주가 학사 공을 스승으 로 받들고 교화를 보급한지 50여년 만에 
정교는 성행하고 후학은 대통하 였다. 
김유신 임강수 설총 김총수 등이 선생의 후학들이며 공자묘를 창설 하였다"고 하였으며, 
목은 이색은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예악, 시, 서 (예법과 음악, 시와 글씨)의 
발전으로 많은 군자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공자라 할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십재명벌로 손꼽혔다.
[남양대보(南陽大譜), 한국씨족연구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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