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최남부의 소도시 안성의 동쪽 중심지는 죽산으로 죽주산성자락에 쌓여 있는 형태로 시내가 형성 되어 있다.
또한 그 앞으로는 아름다운 용설 저수지가 최고의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고 그 옆으론 동아방송대학과 두원 공과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죽산시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곳에 깔끔한 신축건물인 죽산 아트빌 7개동이 위치해 있다. 
아침 일찍 죽산고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아들 조각남과 1학년 딸 조빛나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최화순은 한숨을 돌리고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에 은은한 향의 버츄오 마스터 오리진 코스타리카를 내려 마시는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
C동 501호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며 풍부한 맥아향과 섬세한 곡물향의 완벽한 균형감을 느끼고 있을 즈음 고급스러운 주황색의 레이디 어브 샬롯이 흐드러지게 핀 화단가에 예사롭지 않게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 왠지 모를 호기심이 일고 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창으로 다가가 그사내의 동선을 따라가며 한참을 바라다 보고 있다.
오십대로 보이는 그는 때이르게 하얗게 세어 있는 머리카락에 반쯤 팔을 걷어 올린 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흰 머리칼, 흰 셔츠와 대조적인 구릿빛 피부색이 그가 건강한 사내임을 들어내고 있다.
그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내가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순간 초등학생 시절 문방구에서 무언가를 훔치다 주인에게 들켰을 때처럼 그녀의 심장은 쿵쾅 거렸고 볼이 붉어져와 얼른 창문을 닫고 말았다.

최화순 그녀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남편과 두남매를 둔 중년의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녀의 남편은 죽산 외곽 지대에서 소들 목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충분히 집에서 출퇴근을 할수 있음에도 임신한 소들을 밤세워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목장 숙소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녀의 남편이 가정생활에 소흘하거나 다른 여자들을 바라보거나 한것은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 나가는 중년의 아저씨일 뿐이다.
그녀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상위권이었으며 농어촌특례입학으로 서울의 최상위 대학에 진학 할수 있다는 신념 으로 밤늦게 까지 학원과 독서실에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가끔 따분했지만 그정도의 매너리즘은 동내 여자들과 시내 베이커리 카페에서 수다를 떨면서 충분히 해소할수 있었으며 남편에 대한 큰 불만은 없다.

오늘밤 최화순은 평상시와 달리 늦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다.  
굵게 휘어진 펌기의 흰머리카락이 매력적인 사나이가 자꾸만 그녀의 머리속을 어지럽히고 있다.
남편과의 20여년에 걸친 결혼 생활중 다른 사내에게서 이런 기분을 느낀것은 처음이다.

늦게 잠이든 최화순이 비몽사몽 잠을깨었을땐 이미 8시가 넘어 있었다. 착한 아이들은 벌써 등교를 했고
집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커튼 사이로 공작의 날개짓 같은 아침 햇살이 스치듯 들어서고 있다.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을 때우려 했지만 식빵이 보이지 않는다.
간단한 세안과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아트빌 앞 빠리바게뜨에서 빵 몇가지를 골라 되돌아 오는길에 그녀는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듯 멈춰서고 말았다.
장미꽃 화단에서 어제의 그가 옅은 블루톤의 셔츠를 입고 서서 그녀에게 왼손을 흔들고 있다.
끈적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은 사내의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머리속으로 들어 오고 있다.
그녀는 그의 미소에 최면이라도 걸린듯 왼손에 들고 있던 빵을 오른손으로 바꿔 잡으며 왼손을 들어 응답하고 있다.
"저 혹시 최화순씨 아니신가요?"

그 남자의 이름은 조안환이다.
25년전 그녀가 L통신사에 처음 입사 했을때 그녀의 직속 선배가 바로 그였다.
친절함이 배어 있는 그의 이끔에 그녀는 회사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고 회사 체육 행사로 벌어진 팀별 골프 대결에서 조안환의 파워풀한 스윙은 그녀를 사랑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해외지사로 발령이 났고 송별식이 있던 밤에 고백할 기회조차 없던 그녀는 홀로 외사랑의 처절한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그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외국 여자와 결혼 했다고 하는데 확인 할 방법은 없었다.

501호 창가에 그들은 마주 앉아 있다.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물어 보기에 바빴다.
"안환 선배는 결혼 하셨나요"
"화순씨는 내가 결혼한것 처럼 보이나요"
일어선 조안환이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을 보며 "화순씨는 참 행복해 보이네요"라고 말했다.
"참! 선배는 결혼 생활이 다 그렇쵸 뭐,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기로 결정한 순간 어떤면에서..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랑이 멈추는 때 이기도 해요"
"난 아직 싱글이에요..그리고 사진취재를 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혹시 화순씨가 매산리 석불입상하고 죽산리석불입상을 안내좀 해줄수 있어요"
최화순이 약간 망설이다 어쩔수 없다는 표정으로 "네 해드려야죠 제가 죽산초등학교 다닐때 소풍을 죽주산성 으로 갈때마다 지나던길이 미륵당 길이에요"라고하며 미소 지었다.

봉업사에 있는 죽산리석불입상은 죽주산성에서 결실된것을 이곳으로 옮겨온것이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곳에 매산리 석불입상이 위치해 있다.
이 두개의 석불입상은 미륵궁예의 영향으로 세워진 것들중에 하나일수 있고 서민적인 온화한 인상이 
특징이라는 설명을 최화순이 하고 있고 조안환은 분주하게 사진촬영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만남은 몇일간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그 몇일후 오후에도 둘은 사진촬영을 하기위해 약속이 되어 있다.
숙소인 죽산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까운 호텔H를 나서 11시경 그린커피숍에 들른 조안환이 브런치를 음미하며 옆테이블 중년 여자들의 수다에 귀를 귀울이고 있다.
그녀들은 죽산아트빌 A동에 사는 여자가 가증스럽게 학교 남자 선생님과 바람을 피웠으니 자기들이 힘을 합쳐 아트빌에서 내쳐야 한다는 말을 모으고 있다.

조안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몇집 안되는 공동 주택에서 여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배척되는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으며 그게 두려 우면 사진촬영의 안내동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최화순이 설사 그런일이 생기더라도 지금은 선배와 같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2주뒤 조안환의 석불입상에 대한 취재와 사진촬영이 완료 되었다.
조안환과 최화순이 미륵당길을 걷고 있다.
조안환이 말했다.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일생에 오직 한 번만 오는 것이요,
나와 같이 하고 싶다면 내일 아침 9시까지 매산리사지 앞으로 나와 주시요"

그날저녁 장미꽃이 내려다 보이는 베란다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 최화순이 조안환에게 쪽지를 보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지금의 가족을 버릴수는 없으니 자신을 기다리지 말고 그냥 떠나라는 내용 이었다.
조안환이 당신이 오든 안오든 나는 내일 9시에 그곳에 있으겠으며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와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긴가뭄끝에 내리기 시작한 단비가 9시경에는 제법 굵은비가 되었다.
조안환이 걱정이된 최화순이 봉업사에 이르렀으나 뜬금없이 어젯밤 늦게 걸려온 남편의 "당신에게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진심으로 사랑하오."라는 말이 그녀의 발길을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녀의 발길이 멈춰선 봉업사지에서 미륵당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700m 가면 작은 마을이 있고 한복판에 들판을 응시하고 있는 석조보살 입상의 얼굴이 보인다.
보호각으로 설치된 담장의 미륵당안에는 조안환이 우산없이 비를 한없이 맞고 서 있었다.

*뜬금없이 클린트이스트우드가 감독하고 주연한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오마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오마쥬도 뭣도 아닐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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