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편하게 한 인간들 6편
김재운



이번 편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고 숨겨 버렸으면 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내 인생살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큰 충격파를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통신사에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처음으로 발령받은곳은 수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발안이라는 곳으로 정말 작은 읍소재지였다.
그 곳에선 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도 하고 전기실 교대근무로 시간이 널널해진 후엔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여러해 동안 집가까운곳으로 발령 내줄것을 정식절차를 통하여  신청하여 7년만에 
평택으로 전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곳도 안성에서는 30여분이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 였다.
시험실을 거쳐 선로과 사무실에서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모처럼 열린 노조
집회현장(조계사)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토요일에 갔다 일요일 일찍 돌아왔지만 너구리처럼 냄새를 잘맡은 것인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스너프과장(조애자 남편으로 얼마전 본인이 사망한것으로 부고가 올라왔음)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내 토요일 행적을 알아냈고
그바람에 나는 안성과는 반대방향인 안중이라는 곳으로 집에서 더멀게 귀양을 가게 됐다.
회사방침으로 노조관련 집회에 참석한 죄로 책임추궁을 당하는건 어쩔수 없다고 해도 
정말 억울한건 같이 노조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누구는 귀양을 가는데
일부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멀쩡히 자기부서에 온전히 보양 하면서 노조활동으로 인한
인금인상등의 과실은 공평하게 적용받는다는데 있었다.
부가적으로 더욱 울화가 치미는것은 노조가 노조원들을 충동질해 집회를 가졌으면 노조원들을
어느선에서는 지켜줄줄 알아야 하는데 중앙의 강성 노조와는 달리 각 지사에 있는 지부장들은
여전히 지역 간부들에게 부화뇌동을 하는경우가 흔했다.
안중에서는 사무실일을 포괄적으로 하게 되어 혼자 이리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나몰라 하는 자들은
탱자거리며 전기실에 모여 고스톱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숨이차게 힘들었던 그날 나는 꼭지가 돌아버려 심한 소란을 피웠다. 
그때 출타했던 지점장이 돌아와 나에게 연유를 물어왔다.  
그당시 지점장 윤용식은 쉬쉬하면서 적당히 무마시키고 싶었겠지만 근무시간중 노름과 관련된 
내용이 평택지사 또는 본부까지 새어나간다면 본인을 포함한 그지점 주요인원들이 무사치 못할것을 
아는 능구렁이 였기에 어떻게 손을 썼는지 나를 달래는 차원에서 안성으로 발령 내주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집근처로 오게된 나는 전력실에서 어느정도 근무를한후 내가 주특기로 삼고 
싶은 전송실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게 나중에 불행의 시초가 될줄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안성 지점에서의 업무량은 회사가 전직원의 영업화를 극심하게 몰아부치던 시기로
본업보다는 아파트 등에 나가 영업활동을 하며 상품판매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는 작은 시골로 발령 받은 지점장, 과장등이 더큰곳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필요이상으로
직원들에게 영업판매건수를 할당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확인은 할수는 없었다.
그당시 전송실의 실장은 양인덕으로 나와 동년배로 발안 있을때 교육을 받으러가면서 몇번 
만난적이 있던 사람이었었다.
그가 선로과 대리로 있던 김재운이 기계과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사무실 대리로 가게 되었다.
어느날 양인덕이 나를 불러 전송실에서 실장을 맡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이곳에 근무한지
얼마되지 않아 시설에 대해 잘알지 못하니 이곳에 대해 잘아는 사람들중에서 선택하라고
간청 했으나 그는 나를 실장자리에 올려놓고 말았다.
불안해 하던 내생각대로 실장업무를 맡자마자 일 관련문서가 쏟아졌다. 
전송쪽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안성 관내의 광케이블
내역을 전수 조사하여 입력하라는 내용이 대다수 였다.
나중에 안사실이지만 광코아 시스템 입력은 오래전부터 있어온것인데 양인덕이 차일피일 
미룬것인지 전혀 진척이 안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안성 전송실에 실질적인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을 같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광코어 선번장의 내역을 실제와 대사를 해보았지만 실제 입력해야하는 내용과 많은 차이점이
있어 이를 어떻게 대사해야하는지 얼마간 고민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작업하다 안되면 평택지사 전송실에가서 일을 배우고 올까도 생각 했지만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송실 직원들에게 물어 봐야 늙은 여우 조씨와 오래근무했지만 수박 겉핡기만 
한이들이 내용을 알리 만무 했다.
그렇게 광코어 입력에 대해 늦게까지 고민을 하고 하고 있을때 김재운과장으로
부터 전화가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이자식 저자식하며 왜 전송시스템 입력이 늦어지고 있냐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업무 부담에 대한 스트레스로 과부하 상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욕까지 듣고 있으려니 눈앞이 캄캄하면서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방향을 잃어버리고 
멘탈이 나가고 말았다.
줄기차게 땍땍거리던 김재운이 당장 올라오라고 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가 손을 올리고 
나를 때릴것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며 그대로 원투 펀치를 날리고 말았다.
이는 멘탈이 나간 상태에서 발생한 몸의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런후 직원을 때릴려고 까지 하냐는 생각에 있는 속에 있던 악다구니를 모두 토해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송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온몸에 열이 화끈 거리고 있었다.
잠시후 노조지부장 백봉현이 나를 찾아왔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지금 김재운 과장이 병원으로 갔고 눈을 다쳤다고 했다.
그는 평택지사에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 사유서를 적으라고 했다.
식지않은 열기속에 끙끙거리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세세하게 있는그대로 작성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렇게 작성하면 나만 잘했다는게 되니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식으로 작성하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인사위원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리고 김재운은 천안 단국대학교에서 안와골절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폭행이라고해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수백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표를낼 각오를 하고 연차를 내고 집에 있는데 평택에서 모대리(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가 왔다.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 했다.
그가 말했다 뭐하러 사표를 내냐고 그냥 처분 받고 다니는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지금에서의 생각이지만 이때 이말을 해준 그분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후로 애 업은 집사람이 천안 단대까지 김재운 병문안을 가고 치료비까지 냈다.
지금 생각이지만 본인이 자기 직원의 일에대한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했다는 일말의 죄책감으로 그때 그냥 공놀이하다 맞았다고 했으면 눈치빠르지 않은 의사라면
의료보험이 적용되 치료비가 경감이 됐을텐데 ...참 이부분이 다시한번 괘씸한 부분이다.
하긴 부하한테 두들겨 맞은것도 쪽팔리는데 놀다가 다쳤다고 속이고 치료비를 
낮춰줄 이유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을 게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는 3개월의 징계를 받았고 김재운은 그후로 몇년동안 과장이라는 
보직을 맡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부장이라는 작자들은 간부와 직원의 싸움에서 징계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하는데 정말인지는 알수 없었다.
그일이 있은후 안성에서는 당연히 근무를 할수 없었고 송탄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몇년동안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간부라는 자들은 모두 같은 편이라 나만보면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서로 정보를 공유 했다는 정황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니
송탄의 지점장이 발령 첫날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것 또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전송실 신실장에게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직장에서 높은 보직을 맡지 못한것은 이때의 김재운과의 악연이
가장 컸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 것뿐이겠는가 이 사건은 나의 인생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에 대한 불이익으로 
알게 모르게 고생을한 집사람에게 무척이나 미안하고 안됐다는 생각을 잠시도 떨쳐 버릴수가
없게 되었다.

나를 불편하게 한 인간들 6편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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