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며....2

 

매형과 누님, 그리고 장례지도사가 도착했다.

지도사의 안내대로
안성 집에가서 어머님 영정 사진과 수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께 전화해 친척들에게 연락해 줄것을 부탁 드리고
동네 분들과 어머님이 다니신 성당 구역장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그렇치만 연락할곳을 빠트렸는지를 검증해볼 여력은 없었다.

괜히 마음만 바쁘다. 구름속을 걷는듯 꿈만 같아 슬퍼하고 있는지 조차

내 자신이 의심 스럽다. 어머님이 돌아 가셨는데 어찌 이럴수가 있을까..

정신 없음만을 탓하고 있어야 하나...다른 상가를 방문 했을 때 거기

상주들이 슬퍼하지 않는다고 흉을 본적이 있었다.

아 그들도 이래서 그랬구나...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감을 할수 없기

때문이구나...장례식이 모든 끝난후 어머님의 빈자리가 새삼 느껴질때

그때가서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 올수 있겠구나...


어머님 영정 사진 주변을 장식할 국화꽃과 음식을 50인분정도
신청을 하고 각종 일회용 식기류, 음료수등의 숫자를 직원과 확인 했다.
일회용 그릇의 경우는 내가 다니는 회사나 매형의 회사에서 상조용
상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데 어머님이 수십년 다니시며 활동하시던 안성 구포동 성당
분들이 오셔서 연도를 해주시기 시작했다.
다 어머님의 은덕이시지만, 다행이고 고마우신 분들이다. 
이전에 회사나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의 상가집에 다녀 보면서 많은 손님과
조화로 인해 주늑 드는 나를 발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결혼을 안하셨고...그렇다고 내가 발이 넓은것도 아니니 어머님
돌아가셨을때 상가가 너무 썰렁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를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매형이 다니시는 회사에서 먼저 일회용 그릇과 조화가 도착 했다.
얼마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조화가 왔다.
아..달랑 조화 2개가 다겠지...
어머님의 돌아가심을 슬퍼만 하기에도 모자랄 순간에 이런 근심을 해야만
하다니..내가 언제부터 이리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말인가..
불필요한 근심을 잊어 버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당 분들과 어머님의
연도를 받치기 시작했다.
그런후 나와보고 깜짝 놀랐다. 매형앞으로 온 것과 내앞으로 온 조화가
9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4시가 넘어 서자 성당 분들의 이어진 연도가 끝났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때 돌아가신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냐고
여쭈어 본적이 있었다. 대답은 싫다시는 거였다.
결국 진천 실원리 선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에 합장을 해야한다.
작은 아버님께 전화를 했다. 혹시 고향 실원리에 연락을 하셨는지를 물어
봤다. 대답은 본인께서도 실원리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아~ 머리가 복잡해 진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서 묘소에서의 장례준비를
한단 말인가...
턱하니 믿고 있던 작은 아버님의 너무나 실망스런 대답에..한참을 멍하니
있다가...실원리와 평상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친척 아저씨께
연락 종중 총무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묘역 작업을 부탁 드렸다.

 

나의 회사에서 조문객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째날은 많지 않아 쓸쓸한 편이다.
아직까지 가까운 친척들 조차 거의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쓸쓸한 장례식장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인가...어머님이 성당을 다니시지 않았다면...조문객 없는 장례식을
치르는 불효를 저지를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둘쨋날 아침 7시경 부터 매형회사 분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나의 회사에서도...친인척들의 방문도 이어 졌다.
정말 다행이다. 제법 많은 수의 조문객을 맏이 할수 있다는게 이리 안심될수
없었다.
9시 경부터는 다시 성당분들의 연도가 이어졌다.
밖은 많은 비가 오고 있다.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고 있다.
어쩐다..내일까지 비가 내리면...
11시 입관의식이 시작돼었다.
현대종합상조에서 나오신 두분이 어머님의 염을 맏으셨다.
성당 분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형, 매형, 누나 그리고 우리 내외가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간간히 흐느껴 우는 2시간여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어머님은 베옷 한벌에
온몸을 단단히 매이셨다.
입관을 마친후 식장으로 돌아오면서 조문객을 계속 맞이했다.
다행인것은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다.
오후는 연도와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이 제법 붐볐다.
저녁에는 같은 사무실의 여자 과장님들과 지인, 친척들도 줄을 이었다.
몇몇 분들은 고스톱 판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1시가 넘어서 우리 형제는 모여서 부의금을 정리 하였다.
제법 많은 분들이 다녀 가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내일은 발인이 있는날이다.
쉬는날이 아니니 장례절차를 부탁하기가 어렵다.
사촌들이 제일 만만 하지만 그들은 사정도 많고 탓도 많다.
남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결국 처남들과 회사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수 밖에 없었다.
이틀째 밤 잠시 눈을 붙혔다.
6시에 일어나 식사와 장례식장 정리를 한후 작은 아버님을 먼저 실원리로
가시게 했다.
그곳에서의 식사준비는 어제 상조회사에 부탁을 이미 해놓았다.
8시 출관 행사를 연령회에서 해주시고 구포동 성당으로 출발을 했다.
9시 본당 신부님이 피정을 가셔서 죽산성당 신부님이 오셔 장례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차분한 목소리는 슬프다가도 위로가 되었다.
10시경 실원리로 출발을 하였다. 버스에는 친척과 성당분들이 자리를 잡
으셨다.
10시 40분경 실원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진행이 좀 늦어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아버님 산소 밑에 가구 공장이 들어 섰는데 그곳 주인이 올라와 난장을
쳤다는 것이다.
요즘 법이 집에서 500M 내에는 묘지를 쓸수 없게 돼어 있단다.
하지만..아버님 산소는 그 공장을 건축하기 십수년전에 쓰여진것이고
그때 어머님을 위한 돌관까지 준비가 돼어 있었던걸 어쩌란 말인가...
이제와서 묘역을 옮기란 말인가...
실원리 친척분들이 한참을 설득을 해서야 난장이 가라 앉았다고 했다.


포크레인 기사의 기막한 수완으로 묘소가 꾸며지고 매형의 고단함으로
잔듸가 심어졌다.


이번에는 집안 어른들이 제사를 지내라고 독촉이다.
형님과 집사람이 어쩌냐고 안절부절하고 있다.
내가 나설수 밖에 없다. 

어머님이 성당을 오래 다니셨기 때문에 성당식으로 장례예절을 하기로

했고 살아계실적에 어머님 또한 그러길 바라셨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어머님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수 있었다.
역시 세상은 혼자서는 살수 없다는걸 세삼 스럼게 느낄수 있었다.
처음부터 도와주신 성당분들...나와 매형의 회사분들...실원리의 고향
친척 분들.... 처가집 형제들...이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어머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었을까...
옥에 티라면 상조에 가입을 했음에도 생각지 않게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금적 부담이 상당하다는걸 들수 있을 거다.
하지만 어머님을 좋은곳으로 보내 드리기 위해 드는 필수적인 부담이라고
위안을 삼으니 마음은 편안해 진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되돌아와 요셉병원을 올려다 보자 모든게 아직 꿈같다는

생각과 아직도 5층 병실에 어머님이 누워 계실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몰려와 눈앞이 어두워지고 어제의 폭우가 내리는듯
하다.
어머님 좋은 곳으로 가셔서..아버님과 행복하신 해후를 하시길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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