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욱은 경기남부의 작은 읍내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시내를 관통하는 냇가 뚝에서 가까운 솥공장 후면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기욱의 집을 기준으로 위집엔 장희석이 아랫집엔 세필이가 살고 있었고 그들은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어울리며 매일을 골목길과 솥공장 그리고 냇가를 돌아 다니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당시 기욱네는 방하나를 사용했고 나머지 4개의 방은 세를 주었다.
그것은 적은 평수의 농사를 지으며 불규칙적으로 공장을 다니면서는 삼남매를 키우기에 애로사항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기욱은 동네 친구와 그의 형제들과 어울리며 냇가에서 개구리와 뱀등을 잡아와 할머니가 대문 옆에서
키우고 있던 돼지에기 넣어 주던 기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또 하나의 기억은 넓은 대청마루 밑으로 마당이 꽤 크게 있었는데 사나운 닭이 있어 기욱이 내려서려고
할때마다 쫏아오는 바람에 그 닭이 백숙이 되기 전까지 제대로 흙을 밟지 못했었다.
그 싸나운 닭의 마지막 기억은 아버지가 털을 다 뽑았는데도 뛰어 도망가 그것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분주하던 아버지의 모습또한 메모리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번은 여름 장마철마다 물난리를 겪었는데 한해는 너무 심한 비가 와 집옆 도로를 타고 흐르던
노깡이 보이지 않아 그곳을 건너던 희석이의 형이 그속으로 빨려 들어 갈뻔한걸 아버지가 잡아 구해
줬던 모습도 남아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희석의 부친이 우리 부친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고 죽을 뻔한 자기 아들 
야단치기에 바빴다고 하니 이또한 세세한 인간의 한부류를 볼수 있는 장면 이겠다.
그렇게 잘지내던 솥공장뒤의 마을에 도로가 나면서 3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이사를 갈수 밖에 없었고
기욱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해 기욱이네는 시내 변두리에 있던 화장터 아래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마을에 가서도 기욱은 높은 언덕위의 반가네 잡화가게를 하는 집의 3살 연배의 형석과 아랫부분의 
자전거포집의 한살아래 유뻑과도 대보름날 거북이 놀이를 하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등 너무나도 사이좋게 잘 지냈다.
그렇게 한달여가 지났을때 동네에서 꽤 먼 초등학교 가는길 언덕위에 있는 교회 근처에서 8명의 친구들과
동내를 배회하다 형석이 말했다.
너 유뻑이 이길수 있어...하더니...유뻑에게도 너 기욱이 이길수 있어...라고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했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나 했는데 외부에서 이사와 같이 놀자고 따라다닌 기욱에 대해 텃세의 맛을
보여주고자 결심한 형석이 동네 싸움꾼 유뻑을 충동질 하기 시작 한것이다.
날랜 유뻑이 느닷없이 날린 주먹에 기석은 그대로 고꾸라 졌고 코피를 쏟고 말았다.
이렇타할 저항을 할수 없었던 기석은 8:1의 기싸움에 그저 얻어 터지고 말았다.
모두 가버리고 난 다음 기석은 비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들어서는 부어오른 기석의 얼굴을 본 어머니가 너 왜그러니 하며 다가 왔다.
잡화가게 형식이가 애들을 충돌질해서 얻어 맞고 말았다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6살 많은 형이 내 이자식을 가만 안둔다고 하면 뛰어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밖에 소란 스러웠다.
형식의 동내 유지인척 하는 반가 잡화가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집으로 와 우리아들 다리를 다쳐 
걷지를 못하는데 가만 안두겠다고 폭언을 하고 있었다.
화가난 형이 동내에서 놀고 있던 형식을 한차라 걷어 찼는데 그대로 걷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방안에서 엉망으로 부은 얼굴을 하고 있던 기욱에게 나와서 니가 맞은걸 이야기 하라고 다그
쳤지만 심약한 기욱은 나설수가 없었다.
그 상황이 무섭워 기가죽은 기욱은 다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동네사람이 다 모여든 상황에서 아버지가 일단 애가 걷지 못한다고 하니 두들겨 맞은 아들은 둘째고
형식을 정형외과에 데리고 갔다 왔다.
그런데 기가 막힌것은 병원에 갔다 오자 마자 형식은 공동묘지 뒤산을 들개 처럼 뛰어 다녔다는것이다.
나중에 부모님하는 말을 들은 거지만 중학생인 형식이 재미삼아 동내 동생들을 충동질해 기욱을 두들겨 
팬 상황에 혼날까봐 다치치도 않은 다리를 못걷는다고 숭을 쓴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반 양아치 반가네 잡화점 부부가 알면서도 기욱의 집을 업신여기고 막말을 한것이 사실
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여린 마음의 기욱의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어디를 가든 친구들과 잘어울릴수 있다는 생각이 뒤집힘과 동시에 자신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그리고
형이 무식한 인간들에게 막말을 들은 상황을 만든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수 없었다.
그때까지 친구들과 너무나도 잘어울리던 기욱의 성격은 급격히 폐쇄적으로 바뀌었다.
학교를 갔다오면 집안에서만 지냈고 더이상 밖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거부 하였다.
어른이된 기욱은 아직도 그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지만 지금도 다른 사람들과 잘어울리는것에 많은 애로사항을 가지고 있고
발넓은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다.

그러면서 그는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허무맹랑한것은 아니라는걸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가 살던 동네의 대부분의 어른들 직업은 목수, 운전수, 노가다 십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세대가 바뀌면서도 다수의 직업은 목수가 대세 였다.
그리고 그동네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술취해 고래고래 소리지르 골목길을 올라가는 주정뱅이 삼총사
태근이 어머니, 태망이 아버지, 기순이 아버지가 살고 있었고 그들간의 술주정할 기득권 싸움도 
그치질 않았다.
그러니 그동내 인간들과 어울리지 않아 자신은 목수, 운전수, 노가다 십장의 직업 그리고 술주정꾼
되지 않았다는데 만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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