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머리속의 정화

 

오늘도 목구멍이 포도청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루 작업량을 소요시간량에 맞춰 작성을 해야 했다.
왜 이런것이 필요한것일까..
같은 부서내지만 일의 내용에 동질성이 전혀 없는데..
한곳의 인원이 줄어 갈때마다...
다른곳은 피해를 당해야만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어찌
직시해야 하는걸까?
그런 생각이 솟아 오르자 답답함의 레벨메터가 머리를
뚫고 올라갈거 같다.
불쌍한 사람들...어찌 짝궁들의 관리를 그리도 소홀히
들 했을까!
이제와서 뻔뻔하게 옆자리에 도움을 청한들 반겨줄이
누가 있단 말인가...
누가있어 발전적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이를 말릴수
있단 말이가..
초월적 영역침탈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지는건 불안정한
조직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 와해될지 모른다 할지라도 낯갈이가 심함을
탓할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다 못히 어지러울때...눈꽃
덮힌 산속의 짝궁으로 부터 사진 한장이 날아왔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어찌 아니 마음을 열지 않겠는가...
눈을 정화 시켜주는이 있으니 고마을 뿐이다.
옆자리에서 시샘을 한다 해도 나는 그저 고마을 뿐이다.
잠시나마 이 지리한 속박속에서 벗어날수 있게 해주니..
고맙지.
사랑해...미니-미
그리고 고마워...

 

 

아~ 우리는

 

우리는 상념이 멈출날이 없어라
우리는 조용히 앉아있길 바라나
저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니

 

어찌할꼬나..
저찌할고나..
어화두둥둥..

 

나두 산행좀 가서 눈과 머리속
정화좀 했으면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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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하는, 불같은 성격

 

소시적에 욱하는 성질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거다.
젊은 혈기는 우리를 불의에 항거하라고 충동질 한다.
그러니 참을 인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할수 있다는 격언을 망각한채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그결과로..
이가 부러지든지...
병원에 실려 가든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고소를 당하던지..
유치장 신세를 지던지..
하게 된다.
그러던것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처자식이 딸리게 되면 서서히 식어 가기 시작한다.
왠만한것은 속으로 눌러 참고 삭히게 된다.
좀 부당하다 싶은것에도 순응을 하는 착한 양으로 변모하게 된다.

오늘 추석에 쓸 흰떡을 만들기위해 묵을쌀을 불려 차에싣고 중심상가
떡집으로 향했다. 두어 바퀴를 돌았지만...차들이 계속 밀려들고
정차할 공간은 없다.
하는수 없이 차량이 뜸한 틈을 타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쌀을 내려
놓았다.
그사이 10여초가 흘렀을까...어느틈엔가 다가온 차량에서 경적을
울리며 난리다.
다급해 쌀을 길에 놓고 뛰어와 운전석으로 들어서며 조금만 참아주지..
라고 소리를 쳤다.
급하게 운전대를 돌려 차를 빼주려 하자...충분한 공간 사이로 차가
지나가면서 창문을 열여 소리를 친다.
"당신 뭐라고 했어..차를 길에 세우면 어떻게해..."
나보다는 한참 어리고 완력 있어 보이는 젊은놈이 발악을 한다.
순간 속으로 관세음 보살을 외치며..
"야 이자식아 큰길도 아니고...이면 도로에서 잠깐 양보좀 하면 안돼냐..
그리고 막말로 옆으로 충분히 지나갈수 있으면서 그렇게 하면 돼지
크략숀은 왜울리냐고..."
이런 생각이 들어지만...입은 분루를 삼키며 다른 말이 나온다.
"빨리 먼저 가시라구요..", " 네 먼저 가세요.."
헐... 몇년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마도 내려 멱살잡이를 했을것이다.
물론 길에 이중정차를 한건 내 잘못이 크지만... 길가에 주차된 차들과
무거은 쌀때문에 잠시 짐을 내릴수 밖에 없는 이웃을 배려해 
기다려 줄수는 없는것일까?
오늘 일진이 무척이나 사나울까보다...
이어서 들른 북수원 홈플러스옆 찜질방의 쫄면맛은 왜이리 입맛 떨어지
는것인지... 면발은 이미 쫄면이기를 포기한 상태고 양념은 행주 빤
물맛처럼 시큼하기만 하다. 도저히 먹을수가 없다.
동네 분식집 쫄면이 얼마나 맛이 있는것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찜질방 구내 식당 아주머니에게 이게 음식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운수 사나운날...무슨 꼴을 당할까 하는 생각에 꾸욱 눌러참고 말았다.
아~~ 푹쉬어야하는 휴일에 겪는 울화통은 일주일을 더욱 힘들게 할텐데..
어찌하나...
앞으로 일주일을 어찌 슬기롭게 대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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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이가 죽었다.

 

햄스터 송이와 둥이가 우리집에 온지는
2년전 수원으로 이사온 해 12월 겨울에 서수원 이마트에서 사왔으니
1년 10여개월이 되어 간다.
송이는 털이 하얗다 하여 눈송이에서...둥이는 털이 검다고 하여 검둥
이에서아이들이 붙혀주었다.
그동안 햄토리 밥을 마트에서 사다 주면서 그들의 생활을 살펴 보는
게 한동안의 낙이 었다.
특히나 두 딸들은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귀엽다고 아주 좋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낮에 얼마전부터 시원치 않아 보였던 둥이가 죽었다.
집사람이 아이들이 알기전에 나보고 와서 치우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 이었다.
저녁에 인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자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내가 인터넷에 찾아 보니 햄스터 수명이 1년 반에서 2년여 정도며
그걸 사람 나이로 치면 70~80세라 말해주며 수명을 다한거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가슴에 슬픔과 자책이 밀려 오는듯 하다. 자신이 요즘
잘 돌봐주지도 않아다며 괴로워 하는것이다.
우유팩으로 상자를 만들어 그속에 넣어 저녁에 나가 나무밑에 묻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좋은곳으로가 갇혀 살지 말고 자유롭게 편히 지내라고
기도를 했다.

저녀늦게 학원에서 돌아온 큰딸 빈이도 펑펑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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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눈물

 

어릴적 기억으로 가장 예뻤던 우리 작은고모
오래전 선산 벌초 있던날 새 아파트 육순잔치에
온가족 중부고속도로 올랐다
저속도로 탓에 고모 눈총 받던때가 새로운데...
고모!
어찌 그리도 빨리 가셨나요...
몹쓸병 걸리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빨리 찾아
뵙지 못하고...
내눈속 들보가 아파...
가시기 이틀전에야 뵈었네요
그날, 돌아와 하느님께 빨리 쾌차 하시길 기도
올렸는데...
그도 헛되이 전화벨 한번에 가셨나요
하늘도 맑던 얼굴 찌푸리더니..
벽제 가시는날..

참았던
굵은 눈물 하염없이 흘리시네요

상계동

 

어제 상계동을 다녀 왔다.
2주전부터 다녀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것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는 집사람과도 공감대를 갖고 있는 상념이었다.
길을 잘몰라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가자고 했다.
집사람은 차를 몰고 가자고 했다.
갑상선 항진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육체적 무리를 삼가는것이
의사의 처방전이었다고 했다.
하는수는 없다. 아이패드에 부랴부랴 네비를 깔고 12시 20분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맞추기위해 출발을 했다.
처음에는 네비 사용방법에 적응을 하기 위해 두어번 헤맸지만
큰문제 없이 12시 경 상계동 백병원에 도착 했다.
은경이와 통화하고 고모부와 함께 막내고모가 있는 중환자실 격리동
으로 들어 섰다.
짧은 머리에 여러가지 장비와 수액등을 몸에 걸치고 있는 고모의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어머니때부터 이어져 온 모습 같아 낯설지는 않다.
요즘은 왜이리 폐암 환자가 많을까...
혈압등의 수치가 너무 떨어져 안정될때까지 격리실에 있다가 일반
병동으로 옮길수 있다고 했다.
고모는 아파서 고생이지만 병수발을 드는 고모부의 고충도 상당할것이다.
그것도 4년이 넘어 서고 있으니...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고모부의 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
오며 늦었지만 잘와 봤다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절대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운전을 하며 은경이와 우리 사촌들끼리도 한번씩 모이면 어떼라고 한 말
을 상기하며...어찌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어머니표 청국장

 

청국장
겨울
방한칸
버스
교복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고등학교시절 안성에는 없는 공업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평택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술자가 최고 대접을 받는다는 사회적 공감대
때문에 나의 아버님도 공업계 고교로 진학해 일찍 취업을 하는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가지셨다. 나또한 장래희망에 대해선 무뇌한
이었기에 그저 그 뜻에 순종을 했다.
그시절 겨우내 도시락 반찬은 김치 였다. 어쩌다 도시락 위에 계란이
올라 갈때면 기분이 업되었지만 그도 잠시 친구들이 떼어가버리고
파편만 남았을때의 실망감이란..
그런 실망감 보다 나를 더 고통속에 몰아 넣었던건 바로 아침에 먹는
청국장이었다.
어머님이 겨울이면 청국장을 만드셨고... 아침에 자주 상에 올리셨다.
문제는 그 꼬리꼬리한 냄새였다.
단칸방, 5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한편에는 단벌 교복이 걸려 있고
바로 등교를 해야 했다.
그것도 만원 버스를 타고 30여분 걸려 평택으로 말이다.
내가 맡아봐도 교복에 밴 청국장 냄새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탄다는게 죽기보다도 싫었 지만 어쩌겠는가
순종파 학생이 학교를 안갈수도 없고...
전후사정을 어머님께 몇번 말씀드렸지만 그후에도 아침 청국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페브리즈 라도 뿌리면 해결 되겠지만...
어제 저녁에 바로 그 청국장이 상에 올라왔다.
냄새와는 달리 맛있게 먹고 있는데 집사람이 이런말을 했다.
"그거 어머님이 만드신건데 마지막이야 이제 없어..."
아~..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8일 째구나...
이젠 어머니표 청국장을 다시는 맛볼수 없겠네..
잠시 두뇌 기능이 정지 했다.
그리곤 아무렇치 않게..대꾸 했다.
"그래...어머니 청국장 이제는 못먹겠구나......"

 

 

 

 

열흘간의 소회

 

어머님이 돌아 가신지도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경황이 없어서인지..슬픈지 아닌지 조차 혼돈 스러웠습니다.
삼우제를 마치고 상복을 반납하러 들른 병원건물을 올려다 보면서 아직도
그곳에 꼿꼿하게 앉아 계시는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잠자리에 누우니...
왜이리 어머님께 잘못한 일들만 생각이 나는지요...
그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내가 아닌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해 조문오셨던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일에 몰두 하며 농담에 웃고 하면서
어...내가 이래도 돼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최소한 49제 까지 만이라도 조신하게 처신을 해야 할거 같은데..
나두 모르게...덜렁이 처럼 굴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놈이 벌써 나를 잊고 저리 행동을 하는구나 하시는것 같아
가슴을 쓸어 내리길 여러번 했습니다.
그저 제가 바라고 싶은것은
어머님이 돌아 가셔서..
먼저가신 아버님을 만나뵈옵고..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평생 살고싶어.."
처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과 알고 지내시던 성당 분들이 좋은 기도를 끊이지 않고
많이 해주셨으니 그걸 노잣돈과 든든한 백으로 삼으시고 천국의 문을
당당하게 걸어가 주세요...

이 못난 아들이 어머님께 드리는 마지막 바램 입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며....2

 

매형과 누님, 그리고 장례지도사가 도착했다.

지도사의 안내대로
안성 집에가서 어머님 영정 사진과 수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께 전화해 친척들에게 연락해 줄것을 부탁 드리고
동네 분들과 어머님이 다니신 성당 구역장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그렇치만 연락할곳을 빠트렸는지를 검증해볼 여력은 없었다.

괜히 마음만 바쁘다. 구름속을 걷는듯 꿈만 같아 슬퍼하고 있는지 조차

내 자신이 의심 스럽다. 어머님이 돌아 가셨는데 어찌 이럴수가 있을까..

정신 없음만을 탓하고 있어야 하나...다른 상가를 방문 했을 때 거기

상주들이 슬퍼하지 않는다고 흉을 본적이 있었다.

아 그들도 이래서 그랬구나...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감을 할수 없기

때문이구나...장례식이 모든 끝난후 어머님의 빈자리가 새삼 느껴질때

그때가서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 올수 있겠구나...


어머님 영정 사진 주변을 장식할 국화꽃과 음식을 50인분정도
신청을 하고 각종 일회용 식기류, 음료수등의 숫자를 직원과 확인 했다.
일회용 그릇의 경우는 내가 다니는 회사나 매형의 회사에서 상조용
상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데 어머님이 수십년 다니시며 활동하시던 안성 구포동 성당
분들이 오셔서 연도를 해주시기 시작했다.
다 어머님의 은덕이시지만, 다행이고 고마우신 분들이다. 
이전에 회사나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의 상가집에 다녀 보면서 많은 손님과
조화로 인해 주늑 드는 나를 발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결혼을 안하셨고...그렇다고 내가 발이 넓은것도 아니니 어머님
돌아가셨을때 상가가 너무 썰렁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를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매형이 다니시는 회사에서 먼저 일회용 그릇과 조화가 도착 했다.
얼마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조화가 왔다.
아..달랑 조화 2개가 다겠지...
어머님의 돌아가심을 슬퍼만 하기에도 모자랄 순간에 이런 근심을 해야만
하다니..내가 언제부터 이리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말인가..
불필요한 근심을 잊어 버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당 분들과 어머님의
연도를 받치기 시작했다.
그런후 나와보고 깜짝 놀랐다. 매형앞으로 온 것과 내앞으로 온 조화가
9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4시가 넘어 서자 성당 분들의 이어진 연도가 끝났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때 돌아가신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냐고
여쭈어 본적이 있었다. 대답은 싫다시는 거였다.
결국 진천 실원리 선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에 합장을 해야한다.
작은 아버님께 전화를 했다. 혹시 고향 실원리에 연락을 하셨는지를 물어
봤다. 대답은 본인께서도 실원리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아~ 머리가 복잡해 진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서 묘소에서의 장례준비를
한단 말인가...
턱하니 믿고 있던 작은 아버님의 너무나 실망스런 대답에..한참을 멍하니
있다가...실원리와 평상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친척 아저씨께
연락 종중 총무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묘역 작업을 부탁 드렸다.

 

나의 회사에서 조문객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째날은 많지 않아 쓸쓸한 편이다.
아직까지 가까운 친척들 조차 거의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쓸쓸한 장례식장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인가...어머님이 성당을 다니시지 않았다면...조문객 없는 장례식을
치르는 불효를 저지를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둘쨋날 아침 7시경 부터 매형회사 분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나의 회사에서도...친인척들의 방문도 이어 졌다.
정말 다행이다. 제법 많은 수의 조문객을 맏이 할수 있다는게 이리 안심될수
없었다.
9시 경부터는 다시 성당분들의 연도가 이어졌다.
밖은 많은 비가 오고 있다.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고 있다.
어쩐다..내일까지 비가 내리면...
11시 입관의식이 시작돼었다.
현대종합상조에서 나오신 두분이 어머님의 염을 맏으셨다.
성당 분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형, 매형, 누나 그리고 우리 내외가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간간히 흐느껴 우는 2시간여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어머님은 베옷 한벌에
온몸을 단단히 매이셨다.
입관을 마친후 식장으로 돌아오면서 조문객을 계속 맞이했다.
다행인것은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다.
오후는 연도와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이 제법 붐볐다.
저녁에는 같은 사무실의 여자 과장님들과 지인, 친척들도 줄을 이었다.
몇몇 분들은 고스톱 판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1시가 넘어서 우리 형제는 모여서 부의금을 정리 하였다.
제법 많은 분들이 다녀 가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내일은 발인이 있는날이다.
쉬는날이 아니니 장례절차를 부탁하기가 어렵다.
사촌들이 제일 만만 하지만 그들은 사정도 많고 탓도 많다.
남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결국 처남들과 회사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수 밖에 없었다.
이틀째 밤 잠시 눈을 붙혔다.
6시에 일어나 식사와 장례식장 정리를 한후 작은 아버님을 먼저 실원리로
가시게 했다.
그곳에서의 식사준비는 어제 상조회사에 부탁을 이미 해놓았다.
8시 출관 행사를 연령회에서 해주시고 구포동 성당으로 출발을 했다.
9시 본당 신부님이 피정을 가셔서 죽산성당 신부님이 오셔 장례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차분한 목소리는 슬프다가도 위로가 되었다.
10시경 실원리로 출발을 하였다. 버스에는 친척과 성당분들이 자리를 잡
으셨다.
10시 40분경 실원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진행이 좀 늦어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아버님 산소 밑에 가구 공장이 들어 섰는데 그곳 주인이 올라와 난장을
쳤다는 것이다.
요즘 법이 집에서 500M 내에는 묘지를 쓸수 없게 돼어 있단다.
하지만..아버님 산소는 그 공장을 건축하기 십수년전에 쓰여진것이고
그때 어머님을 위한 돌관까지 준비가 돼어 있었던걸 어쩌란 말인가...
이제와서 묘역을 옮기란 말인가...
실원리 친척분들이 한참을 설득을 해서야 난장이 가라 앉았다고 했다.


포크레인 기사의 기막한 수완으로 묘소가 꾸며지고 매형의 고단함으로
잔듸가 심어졌다.


이번에는 집안 어른들이 제사를 지내라고 독촉이다.
형님과 집사람이 어쩌냐고 안절부절하고 있다.
내가 나설수 밖에 없다. 

어머님이 성당을 오래 다니셨기 때문에 성당식으로 장례예절을 하기로

했고 살아계실적에 어머님 또한 그러길 바라셨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어머님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수 있었다.
역시 세상은 혼자서는 살수 없다는걸 세삼 스럼게 느낄수 있었다.
처음부터 도와주신 성당분들...나와 매형의 회사분들...실원리의 고향
친척 분들.... 처가집 형제들...이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어머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었을까...
옥에 티라면 상조에 가입을 했음에도 생각지 않게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금적 부담이 상당하다는걸 들수 있을 거다.
하지만 어머님을 좋은곳으로 보내 드리기 위해 드는 필수적인 부담이라고
위안을 삼으니 마음은 편안해 진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되돌아와 요셉병원을 올려다 보자 모든게 아직 꿈같다는

생각과 아직도 5층 병실에 어머님이 누워 계실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몰려와 눈앞이 어두워지고 어제의 폭우가 내리는듯
하다.
어머님 좋은 곳으로 가셔서..아버님과 행복하신 해후를 하시길 빌어 드립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면서...1

 

5월 31일 화요일 새벽에 집사람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안성 성요셉병원 간호사로 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집사람이 먼저 안성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허겁지겁 아이들 깨우고 대충 옷을 갈아 입은후 몇일전부터 챙겨둔 옷가지
가방을 들고 운전대를 잡았다.
조급해진 마음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본적이

없었다. 

동수원 IC로 향했다.
자꾸만 뜨거운 액체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집사람이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경부 고속도
로를 달렸다.
안성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운명 하셨다.
05시 41분...
전화받고 택시타고 바로 도착 했지만 이미 돌아가셔서 형님도 임종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간호사가 위급하다고 전화 한후 거의 수분후에 돌아 가셨다고 했다.
   ''''''''''''''''''''''''''''''''''''''''''''''''''''''''''''''''''''''''''''''''
작년 10월 어느때 부터
어머님이 감기가 있으시고 가슴이 결려 병원을 다니시며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목소리가 잘나오지 않고 쉰것 같은 현상이 지속돼고 있다고 했다.
집사람이 일반 내과 병원만 다니시지 말고 이비인후과를 가보시라고 했다.
동행했던 형님의 병원에서 머리에 이상이 있을수도 있으니 큰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집사람이 수원 아주대학교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다행히 머리CT 상으로는 이상이 없었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처방으로 목소리에 이상이 있는건 좌측 성대가 움직이질
않아서라고 했고 치료를 위해 신약물질을 직접 구매해 오라고 했다.
물론 의료보험이 되질 않아 비싼 가격이었다.
신약물질을 마비된 성대에 주사를 하니 신기하게도 어머님 목소리가 많이 좋아
지셨다.
몇개월이 지난 2011년 어머님이 그래도 가슴이 결린다고 하셨다.
다시 아주대를 찾았다. 몇번에 걸친 힘든 조직검사등을 통해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결국 목소리가 않나오는 원인도 폐에 문제가 있어서 인데도
엉뚱하게 성대 치료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폐암센터 황박사님의 항암치료가 필요하지만 노인분이라
더 힘만 드실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우리를 낙담 시켰다.
결국 진통제와 입맛 좋아지는약, 소화 잘돼는 약만으로 처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왼쪽 가슴 늑골에 고여 있는 물을 빼기 위해 입원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목소리가 정정 하시다.

폐암 말기라는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길어야 5~6개월 사실거란 말은.... 
퇴원하시어 수원 집에 계실때 집사람은 어머님 체력을 보강 시켜 드리기 위

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드리느라 신경 쓰고 어머님 모시고 병원 다니느라 힘
을 썼다.
병원에선 나중에 덜고생 하시기 위해서 방사선 치료만이라도 받게 하시는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혼자서 걸으시기 점점 어려워 지시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휴가를 낼수도 없다.
결국 다시 아주대에 입원을 하셨다. 10번에 걸친 방사선 치료로 가슴속 흰
덩어리는 많아 작아 졌다.
이때즘 어머님은 화장실일을 혼자 처리 하시기 힘들정도로 쇄약해 지셨다.
그걸 처리하는 과정에서 간병인 아줌마와 트러블이 발생하고 빨리 퇴원 시켜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퇴원해 수원 집에 오니 이번에는 용변을 제대로 처리 못해 발생하는 냄새로
아이들이 난리다.
씻으라고 해도 아픈 늙은이가 다 그런거 아니냐며 고집또한 세어 지셨다.
그러면서 안성 봉산동 집으로 가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하는수 없이 몇일간이라도 가보시라고 안성에 모셔다 드렸다.
그런데 몇일 사이에 온몸에 발진이 생기고 가려움증이 발생했다.
다시 아주대에 모시고 갔다.
피부과에서는 폐암센터에서 지어준 약의 부작용 때문일수도 있지만 
조직 검사와 이상한 이름의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어머님의 상태를 봐서는 입원없이 대기하면서 검사를 받는것 자체
가 무척 어려웠다.
하는수 없이 피부과 약만 받고 바로 안성 성요셉 노인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켜 드렸다.
쉬는 주말이면 온가족이 내려가 뵙고...주중에는 틈틈이 집사람
혼자 내려가 어머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는 음식을 해다 드렸다.
요셉병원 5층에 있는 병실에 입원하신후 피부상태는 많이 좋아 지셨다.
같은 병실의 할머니들도 폐암 말기인 분이 맞는지 궁금해 하셨다.
바로 나으셔서 퇴원 하실거 같다고 했다.
어머님도 병실 간병인 아줌마가 너무나 마음에 드신다고 편안해 하셨다.
그렇게 두어달이 흐르고나며서 점점 상태가 나빠지시기 시작했다.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지셨다.
왼쪽 가슴은 완전기능을 상실 했다고 했다.
사진상으로도 하얗게 보였다.
갈수록 말소리도 알아 듣기 힘들어 졌다.
그렇게 잘드시던 음식도 못드시고 링거를 꼽기시작 하셨다.
하루하루 방문 할때마다 말씀을 아예 못하시등 상태가 나빠지시고 계셨다.
5월 28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어머님 상태가 많이 안좋다고 이번 주말에 가족
들이 와서 한번씩 뵙고 가는게 좋겠다고 주치의가 말을 했다고 했다.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좀 일찍 안성으로 향했다.
월요일 까지만해도 문 옆에 계셨는데 창가 가운데 쪽으로 침대를 옮기셨다.
그리고 혈압, 산소포화도, 심박을 체크하는 기계를 달고 계셨다.
말씀은 아예 못하시고 눈동자는 촛점을 잃었다. 말씀을 드리면 약간의
의식이 있으시다는것만 짐작할수 있을 뿐이다.
내일 토요일에는 누나가 병원을 와본다고 했다.
나는 근무를 해야 하므로 일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다. 거의 반응이 없으시다. 다행인것은 산소 포화도가
100%에 가깝다. 90밑으로 내려가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인것이다.
구포동성당 신부님과 지역장님이 오셔서 병자 성사를 올려 주셨다.
집사람이 자꾸 옆에서 훌쩍거린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어제 이어 누나와 매형이 다시 병원에 왔다.
침상 옆에서 대기를 해야 할거 같다는 집사람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일반 병원처럼 보호자가 대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과 의사의 이런

상태가 다음주말까지 갈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단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형님이 가까우니 먼저 오고 우리와 누님이
오는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모두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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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어머님 침상으로 커튼이 닫혀 있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을 대하자 왈칵 눈물이 났다.
집사람이 소리내어 울었다.
형님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장례식장은 지하 성혜원을 사용하기로 했다.
정신이 없다. 머리가 멍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미리 생각 안하것은 아니지만
바보가 되어 버린것 같다.
장례식장 담당자와 가족수를 대비한 호실을 정하고...
회사와 현대종합상조에 연락을 했다.
시간이 있고 가족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니 아침 식사를 하고 오란
직원의 말을 듣고 옆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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