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

 

어제 상계동을 다녀 왔다.
2주전부터 다녀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것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는 집사람과도 공감대를 갖고 있는 상념이었다.
길을 잘몰라 버스와 전철을 타고 가자고 했다.
집사람은 차를 몰고 가자고 했다.
갑상선 항진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육체적 무리를 삼가는것이
의사의 처방전이었다고 했다.
하는수는 없다. 아이패드에 부랴부랴 네비를 깔고 12시 20분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맞추기위해 출발을 했다.
처음에는 네비 사용방법에 적응을 하기 위해 두어번 헤맸지만
큰문제 없이 12시 경 상계동 백병원에 도착 했다.
은경이와 통화하고 고모부와 함께 막내고모가 있는 중환자실 격리동
으로 들어 섰다.
짧은 머리에 여러가지 장비와 수액등을 몸에 걸치고 있는 고모의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어머니때부터 이어져 온 모습 같아 낯설지는 않다.
요즘은 왜이리 폐암 환자가 많을까...
혈압등의 수치가 너무 떨어져 안정될때까지 격리실에 있다가 일반
병동으로 옮길수 있다고 했다.
고모는 아파서 고생이지만 병수발을 드는 고모부의 고충도 상당할것이다.
그것도 4년이 넘어 서고 있으니...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고모부의 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
오며 늦었지만 잘와 봤다는 생각에 우리 부부는 절대적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운전을 하며 은경이와 우리 사촌들끼리도 한번씩 모이면 어떼라고 한 말
을 상기하며...어찌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어머니표 청국장

 

청국장
겨울
방한칸
버스
교복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고등학교시절 안성에는 없는 공업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평택으로 등교를 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술자가 최고 대접을 받는다는 사회적 공감대
때문에 나의 아버님도 공업계 고교로 진학해 일찍 취업을 하는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가지셨다. 나또한 장래희망에 대해선 무뇌한
이었기에 그저 그 뜻에 순종을 했다.
그시절 겨우내 도시락 반찬은 김치 였다. 어쩌다 도시락 위에 계란이
올라 갈때면 기분이 업되었지만 그도 잠시 친구들이 떼어가버리고
파편만 남았을때의 실망감이란..
그런 실망감 보다 나를 더 고통속에 몰아 넣었던건 바로 아침에 먹는
청국장이었다.
어머님이 겨울이면 청국장을 만드셨고... 아침에 자주 상에 올리셨다.
문제는 그 꼬리꼬리한 냄새였다.
단칸방, 5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한편에는 단벌 교복이 걸려 있고
바로 등교를 해야 했다.
그것도 만원 버스를 타고 30여분 걸려 평택으로 말이다.
내가 맡아봐도 교복에 밴 청국장 냄새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탄다는게 죽기보다도 싫었 지만 어쩌겠는가
순종파 학생이 학교를 안갈수도 없고...
전후사정을 어머님께 몇번 말씀드렸지만 그후에도 아침 청국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페브리즈 라도 뿌리면 해결 되겠지만...
어제 저녁에 바로 그 청국장이 상에 올라왔다.
냄새와는 달리 맛있게 먹고 있는데 집사람이 이런말을 했다.
"그거 어머님이 만드신건데 마지막이야 이제 없어..."
아~..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8일 째구나...
이젠 어머니표 청국장을 다시는 맛볼수 없겠네..
잠시 두뇌 기능이 정지 했다.
그리곤 아무렇치 않게..대꾸 했다.
"그래...어머니 청국장 이제는 못먹겠구나......"

 

 

 

 

열흘간의 소회

 

어머님이 돌아 가신지도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경황이 없어서인지..슬픈지 아닌지 조차 혼돈 스러웠습니다.
삼우제를 마치고 상복을 반납하러 들른 병원건물을 올려다 보면서 아직도
그곳에 꼿꼿하게 앉아 계시는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잠자리에 누우니...
왜이리 어머님께 잘못한 일들만 생각이 나는지요...
그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내가 아닌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해 조문오셨던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일에 몰두 하며 농담에 웃고 하면서
어...내가 이래도 돼는건가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고 있습니다.
최소한 49제 까지 만이라도 조신하게 처신을 해야 할거 같은데..
나두 모르게...덜렁이 처럼 굴때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놈이 벌써 나를 잊고 저리 행동을 하는구나 하시는것 같아
가슴을 쓸어 내리길 여러번 했습니다.
그저 제가 바라고 싶은것은
어머님이 돌아 가셔서..
먼저가신 아버님을 만나뵈옵고..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평생 살고싶어.."
처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님!

어머님과 알고 지내시던 성당 분들이 좋은 기도를 끊이지 않고
많이 해주셨으니 그걸 노잣돈과 든든한 백으로 삼으시고 천국의 문을
당당하게 걸어가 주세요...

이 못난 아들이 어머님께 드리는 마지막 바램 입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며....2

 

매형과 누님, 그리고 장례지도사가 도착했다.

지도사의 안내대로
안성 집에가서 어머님 영정 사진과 수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작은 아버님께 전화해 친척들에게 연락해 줄것을 부탁 드리고
동네 분들과 어머님이 다니신 성당 구역장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그렇치만 연락할곳을 빠트렸는지를 검증해볼 여력은 없었다.

괜히 마음만 바쁘다. 구름속을 걷는듯 꿈만 같아 슬퍼하고 있는지 조차

내 자신이 의심 스럽다. 어머님이 돌아 가셨는데 어찌 이럴수가 있을까..

정신 없음만을 탓하고 있어야 하나...다른 상가를 방문 했을 때 거기

상주들이 슬퍼하지 않는다고 흉을 본적이 있었다.

아 그들도 이래서 그랬구나...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감을 할수 없기

때문이구나...장례식이 모든 끝난후 어머님의 빈자리가 새삼 느껴질때

그때가서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 올수 있겠구나...


어머님 영정 사진 주변을 장식할 국화꽃과 음식을 50인분정도
신청을 하고 각종 일회용 식기류, 음료수등의 숫자를 직원과 확인 했다.
일회용 그릇의 경우는 내가 다니는 회사나 매형의 회사에서 상조용
상자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고 있는데 어머님이 수십년 다니시며 활동하시던 안성 구포동 성당
분들이 오셔서 연도를 해주시기 시작했다.
다 어머님의 은덕이시지만, 다행이고 고마우신 분들이다. 
이전에 회사나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의 상가집에 다녀 보면서 많은 손님과
조화로 인해 주늑 드는 나를 발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은 결혼을 안하셨고...그렇다고 내가 발이 넓은것도 아니니 어머님
돌아가셨을때 상가가 너무 썰렁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를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매형이 다니시는 회사에서 먼저 일회용 그릇과 조화가 도착 했다.
얼마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조화가 왔다.
아..달랑 조화 2개가 다겠지...
어머님의 돌아가심을 슬퍼만 하기에도 모자랄 순간에 이런 근심을 해야만
하다니..내가 언제부터 이리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말인가..
불필요한 근심을 잊어 버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당 분들과 어머님의
연도를 받치기 시작했다.
그런후 나와보고 깜짝 놀랐다. 매형앞으로 온 것과 내앞으로 온 조화가
9개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후 4시가 넘어 서자 성당 분들의 이어진 연도가 끝났다.


어머님이 살아 계실때 돌아가신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냐고
여쭈어 본적이 있었다. 대답은 싫다시는 거였다.
결국 진천 실원리 선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에 합장을 해야한다.
작은 아버님께 전화를 했다. 혹시 고향 실원리에 연락을 하셨는지를 물어
봤다. 대답은 본인께서도 실원리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아~ 머리가 복잡해 진다. 그럼 누구한테 부탁해서 묘소에서의 장례준비를
한단 말인가...
턱하니 믿고 있던 작은 아버님의 너무나 실망스런 대답에..한참을 멍하니
있다가...실원리와 평상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친척 아저씨께
연락 종중 총무님의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묘역 작업을 부탁 드렸다.

 

나의 회사에서 조문객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째날은 많지 않아 쓸쓸한 편이다.
아직까지 가까운 친척들 조차 거의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 쓸쓸한 장례식장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인가...어머님이 성당을 다니시지 않았다면...조문객 없는 장례식을
치르는 불효를 저지를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둘쨋날 아침 7시경 부터 매형회사 분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나의 회사에서도...친인척들의 방문도 이어 졌다.
정말 다행이다. 제법 많은 수의 조문객을 맏이 할수 있다는게 이리 안심될수
없었다.
9시 경부터는 다시 성당분들의 연도가 이어졌다.
밖은 많은 비가 오고 있다.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고 있다.
어쩐다..내일까지 비가 내리면...
11시 입관의식이 시작돼었다.
현대종합상조에서 나오신 두분이 어머님의 염을 맏으셨다.
성당 분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형, 매형, 누나 그리고 우리 내외가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보았다.
간간히 흐느껴 우는 2시간여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어머님은 베옷 한벌에
온몸을 단단히 매이셨다.
입관을 마친후 식장으로 돌아오면서 조문객을 계속 맞이했다.
다행인것은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다.
오후는 연도와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이 제법 붐볐다.
저녁에는 같은 사무실의 여자 과장님들과 지인, 친척들도 줄을 이었다.
몇몇 분들은 고스톱 판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1시가 넘어서 우리 형제는 모여서 부의금을 정리 하였다.
제법 많은 분들이 다녀 가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내일은 발인이 있는날이다.
쉬는날이 아니니 장례절차를 부탁하기가 어렵다.
사촌들이 제일 만만 하지만 그들은 사정도 많고 탓도 많다.
남만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한다.
결국 처남들과 회사 분들에게 부탁을 드릴수 밖에 없었다.
이틀째 밤 잠시 눈을 붙혔다.
6시에 일어나 식사와 장례식장 정리를 한후 작은 아버님을 먼저 실원리로
가시게 했다.
그곳에서의 식사준비는 어제 상조회사에 부탁을 이미 해놓았다.
8시 출관 행사를 연령회에서 해주시고 구포동 성당으로 출발을 했다.
9시 본당 신부님이 피정을 가셔서 죽산성당 신부님이 오셔 장례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차분한 목소리는 슬프다가도 위로가 되었다.
10시경 실원리로 출발을 하였다. 버스에는 친척과 성당분들이 자리를 잡
으셨다.
10시 40분경 실원리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진행이 좀 늦어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아버님 산소 밑에 가구 공장이 들어 섰는데 그곳 주인이 올라와 난장을
쳤다는 것이다.
요즘 법이 집에서 500M 내에는 묘지를 쓸수 없게 돼어 있단다.
하지만..아버님 산소는 그 공장을 건축하기 십수년전에 쓰여진것이고
그때 어머님을 위한 돌관까지 준비가 돼어 있었던걸 어쩌란 말인가...
이제와서 묘역을 옮기란 말인가...
실원리 친척분들이 한참을 설득을 해서야 난장이 가라 앉았다고 했다.


포크레인 기사의 기막한 수완으로 묘소가 꾸며지고 매형의 고단함으로
잔듸가 심어졌다.


이번에는 집안 어른들이 제사를 지내라고 독촉이다.
형님과 집사람이 어쩌냐고 안절부절하고 있다.
내가 나설수 밖에 없다. 

어머님이 성당을 오래 다니셨기 때문에 성당식으로 장례예절을 하기로

했고 살아계실적에 어머님 또한 그러길 바라셨다고 말씀을 드렸다.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어머님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수 있었다.
역시 세상은 혼자서는 살수 없다는걸 세삼 스럼게 느낄수 있었다.
처음부터 도와주신 성당분들...나와 매형의 회사분들...실원리의 고향
친척 분들.... 처가집 형제들...이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어머님을 편하게

모실수 있었을까...
옥에 티라면 상조에 가입을 했음에도 생각지 않게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금적 부담이 상당하다는걸 들수 있을 거다.
하지만 어머님을 좋은곳으로 보내 드리기 위해 드는 필수적인 부담이라고
위안을 삼으니 마음은 편안해 진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되돌아와 요셉병원을 올려다 보자 모든게 아직 꿈같다는

생각과 아직도 5층 병실에 어머님이 누워 계실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몰려와 눈앞이 어두워지고 어제의 폭우가 내리는듯
하다.
어머님 좋은 곳으로 가셔서..아버님과 행복하신 해후를 하시길 빌어 드립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빌어 드리면서...1

 

5월 31일 화요일 새벽에 집사람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안성 성요셉병원 간호사로 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다.
집사람이 먼저 안성 형님께 전화를 드렸다.
허겁지겁 아이들 깨우고 대충 옷을 갈아 입은후 몇일전부터 챙겨둔 옷가지
가방을 들고 운전대를 잡았다.
조급해진 마음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본적이

없었다. 

동수원 IC로 향했다.
자꾸만 뜨거운 액체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집사람이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경부 고속도
로를 달렸다.
안성 형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운명 하셨다.
05시 41분...
전화받고 택시타고 바로 도착 했지만 이미 돌아가셔서 형님도 임종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간호사가 위급하다고 전화 한후 거의 수분후에 돌아 가셨다고 했다.
   ''''''''''''''''''''''''''''''''''''''''''''''''''''''''''''''''''''''''''''''''
작년 10월 어느때 부터
어머님이 감기가 있으시고 가슴이 결려 병원을 다니시며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목소리가 잘나오지 않고 쉰것 같은 현상이 지속돼고 있다고 했다.
집사람이 일반 내과 병원만 다니시지 말고 이비인후과를 가보시라고 했다.
동행했던 형님의 병원에서 머리에 이상이 있을수도 있으니 큰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집사람이 수원 아주대학교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다행히 머리CT 상으로는 이상이 없었다.
이비인후과 의사가 처방으로 목소리에 이상이 있는건 좌측 성대가 움직이질
않아서라고 했고 치료를 위해 신약물질을 직접 구매해 오라고 했다.
물론 의료보험이 되질 않아 비싼 가격이었다.
신약물질을 마비된 성대에 주사를 하니 신기하게도 어머님 목소리가 많이 좋아
지셨다.
몇개월이 지난 2011년 어머님이 그래도 가슴이 결린다고 하셨다.
다시 아주대를 찾았다. 몇번에 걸친 힘든 조직검사등을 통해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결국 목소리가 않나오는 원인도 폐에 문제가 있어서 인데도
엉뚱하게 성대 치료만 한 꼴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폐암센터 황박사님의 항암치료가 필요하지만 노인분이라
더 힘만 드실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우리를 낙담 시켰다.
결국 진통제와 입맛 좋아지는약, 소화 잘돼는 약만으로 처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왼쪽 가슴 늑골에 고여 있는 물을 빼기 위해 입원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목소리가 정정 하시다.

폐암 말기라는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길어야 5~6개월 사실거란 말은.... 
퇴원하시어 수원 집에 계실때 집사람은 어머님 체력을 보강 시켜 드리기 위

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입맛에 맞는 반찬을 해드리느라 신경 쓰고 어머님 모시고 병원 다니느라 힘
을 썼다.
병원에선 나중에 덜고생 하시기 위해서 방사선 치료만이라도 받게 하시는게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혼자서 걸으시기 점점 어려워 지시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휴가를 낼수도 없다.
결국 다시 아주대에 입원을 하셨다. 10번에 걸친 방사선 치료로 가슴속 흰
덩어리는 많아 작아 졌다.
이때즘 어머님은 화장실일을 혼자 처리 하시기 힘들정도로 쇄약해 지셨다.
그걸 처리하는 과정에서 간병인 아줌마와 트러블이 발생하고 빨리 퇴원 시켜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퇴원해 수원 집에 오니 이번에는 용변을 제대로 처리 못해 발생하는 냄새로
아이들이 난리다.
씻으라고 해도 아픈 늙은이가 다 그런거 아니냐며 고집또한 세어 지셨다.
그러면서 안성 봉산동 집으로 가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하는수 없이 몇일간이라도 가보시라고 안성에 모셔다 드렸다.
그런데 몇일 사이에 온몸에 발진이 생기고 가려움증이 발생했다.
다시 아주대에 모시고 갔다.
피부과에서는 폐암센터에서 지어준 약의 부작용 때문일수도 있지만 
조직 검사와 이상한 이름의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다.
어머님의 상태를 봐서는 입원없이 대기하면서 검사를 받는것 자체
가 무척 어려웠다.
하는수 없이 피부과 약만 받고 바로 안성 성요셉 노인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켜 드렸다.
쉬는 주말이면 온가족이 내려가 뵙고...주중에는 틈틈이 집사람
혼자 내려가 어머님이 드시고 싶으시다는 음식을 해다 드렸다.
요셉병원 5층에 있는 병실에 입원하신후 피부상태는 많이 좋아 지셨다.
같은 병실의 할머니들도 폐암 말기인 분이 맞는지 궁금해 하셨다.
바로 나으셔서 퇴원 하실거 같다고 했다.
어머님도 병실 간병인 아줌마가 너무나 마음에 드신다고 편안해 하셨다.
그렇게 두어달이 흐르고나며서 점점 상태가 나빠지시기 시작했다.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지셨다.
왼쪽 가슴은 완전기능을 상실 했다고 했다.
사진상으로도 하얗게 보였다.
갈수록 말소리도 알아 듣기 힘들어 졌다.
그렇게 잘드시던 음식도 못드시고 링거를 꼽기시작 하셨다.
하루하루 방문 할때마다 말씀을 아예 못하시등 상태가 나빠지시고 계셨다.
5월 28일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어머님 상태가 많이 안좋다고 이번 주말에 가족
들이 와서 한번씩 뵙고 가는게 좋겠다고 주치의가 말을 했다고 했다.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좀 일찍 안성으로 향했다.
월요일 까지만해도 문 옆에 계셨는데 창가 가운데 쪽으로 침대를 옮기셨다.
그리고 혈압, 산소포화도, 심박을 체크하는 기계를 달고 계셨다.
말씀은 아예 못하시고 눈동자는 촛점을 잃었다. 말씀을 드리면 약간의
의식이 있으시다는것만 짐작할수 있을 뿐이다.
내일 토요일에는 누나가 병원을 와본다고 했다.
나는 근무를 해야 하므로 일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다. 거의 반응이 없으시다. 다행인것은 산소 포화도가
100%에 가깝다. 90밑으로 내려가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인것이다.
구포동성당 신부님과 지역장님이 오셔서 병자 성사를 올려 주셨다.
집사람이 자꾸 옆에서 훌쩍거린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어제 이어 누나와 매형이 다시 병원에 왔다.
침상 옆에서 대기를 해야 할거 같다는 집사람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일반 병원처럼 보호자가 대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과 의사의 이런

상태가 다음주말까지 갈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단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형님이 가까우니 먼저 오고 우리와 누님이
오는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모두 집으로 향했다.
   ''''''''''''''''''''''''''''''''''''''''''''''''''''''''''''''''''''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어머님 침상으로 커튼이 닫혀 있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을 대하자 왈칵 눈물이 났다.
집사람이 소리내어 울었다.
형님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장례식장은 지하 성혜원을 사용하기로 했다.
정신이 없다. 머리가 멍하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미리 생각 안하것은 아니지만
바보가 되어 버린것 같다.
장례식장 담당자와 가족수를 대비한 호실을 정하고...
회사와 현대종합상조에 연락을 했다.
시간이 있고 가족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하니 아침 식사를 하고 오란
직원의 말을 듣고 옆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입장차 -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남의 마음을 다치게 할수도 있는 편견섞인 말들

 

작년 11월 부터 아프신 어머님을 병원에 뫼시며 병간호를
해온사람은 집사람이다. 형님이 계시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고..
누나가 있지만 (나는 이점이 서운하게 여겨질수도 있다) 본인이
몸이 아프고 조카(누나둘째아들)에게 문제가 있어 병원에 계실때도 남
병문안 오듯하고 말았으니 오로지 어머님에 대해 신경을 쓸사람은
집사람 뿐이다.
폐암으로 두번에걸친 병원 입원을 신경쓰고 다닌 사람도 집사람이고
수원 집에 모시고 까다로운 식수발에 똥오줌 냄새나는 빨래에 갈수록
괴팍해 지는 어머님의 성격을 견디어 내야 하는것도 집사람이다.
두번째 입원하셨다 간병인과 트러블이 많아 퇴원해 온뒤 어머님의 성격은
점점더 이상해져 가고 있다. 냄새가 진동을 해도 씻지 않고 옷을 갈
아 입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집사람이 옷을 갈아 입으라고 만 하면
서운해서 안성 집으로 가시겠다고 형님께 전화해 버스타고 내려 간다고
시위성 발언을 하셨다.
식사는 가져다 드리는데로 다 드시면서 친척들 전화나 의사한테는
입맛이 없어 못먹고 있다고 말을 했다.
집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자신의 할머니가 아프셨을때도 장모님 대신에
병수발을 거의 다 했고 돌아 가셨을때 쓰러질정도로 애통해 했다고 한
다. 시어머니에게도 그러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때 친자식들도
하기 싫어 하는일을 도맡아 해왔다.
오죽하면 의사나 간호사가 딸인줄 알았을까...
(집사람이 나중에 한말이지만...병원에서 간호 하고 있다보면 전부다
딸들이지 며느리는 없었다고...)
그러던 집사람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듯 했다.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고 아이들에게도 짜증섞인듯한 말이 늘어 갔다.
왜 아닐까..아프신 시어머니 봉양에 지쳐 가고 갈수록 이상해져만 가는
시어머니는 어쩔수 없이 본인 혼자만의 차지이니...
나는 고심한후 말을 꺼냈다. 어머니 그렇게 안성을 가시고 싶으시면 한번 가서
지내 보세요..큰아드님이 해드리는 밥좀드셔보세요. 하면서 요양등급을
안성에서 신청하고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일주일정도 모셔다 드렸다.
물론 일주일동안 드실 음식장만은 충분히 해드려 독신으로 살아온 형님
을 봐서는 큰걱정이 없었다.
그사이에 집사람의 스트레스도 풀고 신경성 위염에 몸살 기운도 어느정도
다잡길 바랬기 때문이었다.
일주일뒤 다시 아주대 병원 방문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시러 갔다.
그사이에도 집사람한테는 형님으로부터 수시로 전화가 왔다. 냄새가 너무
나서 옷을 갈아 입으라고 했는데 말씀을 안들으신다던지가...과일을 드시라고
사다 드리면 너 통장에 있는돈 다쓰면 죽여버리겠다던지..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발언을 했다는것등등 말이다.
방안에 들어서자 지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둘째 딸아이는 있는내내 코를 막
고 서있었다.
어머님을 살펴보니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 있다.
춥다고 매트를 너무 뜨겁게 해서인지 아니면 진드기 알러지 같기도 했다.
일단 수원으로 모시고 와야 했기에 좀있다 나가시자고 하면서 찰밥을 드시라고
한후 집사람이 발톱을 갂아 드리려고 했다.
그순간 아프니 갂지 말라고 난리를 친다. 그냥 놔두면 너무 길어져 오히려
상처가 날듯 싶어 내가 발목을 잡고 마져 발톱을 잘랐다.
그리고 집사람이 물휴지로 냄새나는 몸을 닦고 옷을 갈아 입힌후 나가시자고
하자 안가고 여기 그냥 있으면서 죽던지 하시겠다고 또 고집을 부리셨다.
강제로 안고 업고 나가려고 하자 이놈의 자식들이 아픈사람을 살살 다루지
않고 더아프게 만든다며 난리다.
왜이리 엄살만 늘었을까..일주일 새에...
그러는사이 나는 조금전 밖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를 떠올렸다. 왜 아프신

어머님을 여기다 모셨나는 말 말이다.
그분입장에서야 이해를 하실수 없겠지...도저히..본인도 시어머니 입장이니
...
내가 들어 오면서 집사람에게 말했다. 당신 이동네에서는 아주 나쁜 며느리가
되겠어...하지만 신경 쓰지마 남들은 내막도 모르고 이상한 말을 할수 있지만
나는 팔불출이라는 말을 얼마든지 들어도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걸
누구한테나 자신있게 말할수 있으니.....
그나저나 가시기전에 정을 다떼시려고 하나 어머님은 왜 갈수록 괴팍한 성
격이 심해지실까..이상태면 요양원이나 병원에서도 안받아 줄까를 걱정해야

할 심각한 상태다...
걱정이 앞선다. 어쩔까나...

이상태가 지속된다면 요양원 또는 병원에 계시다. 집에 몇일 계시다를 반복

할수 밖에 없을 것인데...


 

어머님 한번 가서 계셔 보세요...

 

어머님이 몸이 않좋으셔...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하여 병원을 매일 다녀야 했다.
집사람으로서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분을 모시고 다니기가 만만치 않고 넘어지시
기라도 하면 다칠수도 있었다.
하는수 없이 간병인 실에 입원을 시켜 드렸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입맛 좋아지는 약과 배변이 쉽게 되는 약을 드시면서

기운이 많아 좋아 지신듯 싶은데..간병인이 꼴보기 싫으시단다.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에서 집사람에게 전화가 온다.
퇴원시켜달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큰일이 난듯 싶어 급하게 병원으로갔다.
간병인 아줌마와 이야기 해보면..별일이 아닌것을...오히려 간병인 아줌마가 
항의 할 사안들이다.
미안해 음료수를 사다 드리기 일쑤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이렇다.
화장실의 휴지를 너무 조금씩 사용해 뒤처리가 미흡한건
당연지사로 손에 묻히시거나
옷에말라 붙어 그걸 옷사이로 흘리고 다니시니...아주머니가 귀저기를 차게

하시고 휴지를 많이 사용하시라고 하면 어기 대시면서...아껴야 한다고 하거나..
틀니를 빼지 않고 주무셔 간병인 아주머니가 억지로 빼려고 해서 생기는 
실갱이...
더러운 옷 갈이 입으라고 하면 들은척도 안하기...
게다가..약때문인지 치매 때문인지 가끔 엉뚱한 짓을 하셔서 사람을 놀래키시
도 했다...한밤중에 벌떡 일어 나신다거나...6인 병실을 기도하는곳으로 착각
해서 다른분 문병온 사람들한테 기도도 안한다고 뭐라고 하신다거나..
오죽하면 간호사가 간병인에게 힘드시면 보호자에게 개인 간병인을 쓰라고
말해 보라고 이야기 했단다.
우리 부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치매까지 걸리시면 어쩐다 말인가..
또다시 일요일 퇴원시켜달라고 걸려온 전화에 집사람은 방사선 치료를 다
받으시면 퇴원 시켜 드린다고 달래드리고 일요일날 의사선생님 이야기 없이
퇴원 할수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속으로 어머니가 기운이 많이 회복 되셨나보네..간병인 밉다고 사보타지 까지
하시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일뒤 퇴원 하는날 간병인 아줌마가 집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더란다.
집에 와서도 문제가 발생 했다.
입맛과 배변이 좋아 지는약의 역효과인지..그것을 변기와 벽에 묻히시고
제대로 닦지 않아 그것 가루를 바닥에 흘리며 다니시니...아이들이 싫어
하는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집사람이 옷 갈아 입으시라고 하면 그것도 싫다고 하신다.
게다가 집사람이 청소기만 들면...나 안성 갈테니 간후에 청소 하라고
역정을 내신단다.
집사람 입장에서도 반찬 한가지라도 더 신경 쓰느라 이래저래 힘이들텐데...
내가 저녁에 퇴근해 보면 저녁을 안드신다고 하시기 일쑤다.
죽으려고 하나 보다고 하시면...하는수 없이 집사람이 작은 상에
먹으것을 차려다 방에 갔다 드리며 빈속에 약먹으면 좋지않다고 나중에라고

드시라고 하면 먹기 싫다는 사람 자꾸 먹으란다고 화를 내신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드셨냐고 하면 ..점심때 보신탕 한그릇
드셨고...저녁무렵 튀김등 간식거리도 꽤 드셨다고 한다.
참 걱정스럽다. 다른 친척분들이 전화하면 본인이 드신건 말 안하고 입맛없어
못드신다는 말만 하시니..며느리 입장은 생각을 하시는건지...
왜그러실까..요즘 똥, 오줌 받아내면서 까지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들이 과연

있을까..그런것 감안 하시면 본인께서도 물론 아프셔서 힘이 드시겠지만 최소한
며느리가 갈아 입으라는 옷이라도 바꿔 입어야 하지 않겠나..
지린내 나는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서 애들이 싫어한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오늘은 일요일이다.
작은아이 책상 유리가 깨져 치우고 창문을 열고 청소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시 나 안성 갈테니 그후에 청소 하라고 역정을 내신다.
그러면서 안성 형한테 버스타고 내려 가신다고 전화를 하셨다.
내가 말했다. 정 그러시면 한번 가서 계셔 보세요..계실수 있는지..
어머니 정말 계실수 있는지 한번 안성 내려가셔서..계셔 보세요.

 

인생은 왜사는 걸까요?

참 무거운 주제다.
우주적이거나 실존적 철학의 니체를 떠올리면 당연하다.
감히 나같은 일개 미물에 가까운 사람으로서는 범접조차하기 어렵다.
이러한 무거운 거풀을 한겹 두겹 벗겨 버리고 현실적인...
현미경적 잣대로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좀 가벼워 지려나..
결혼해서 한집안의 가장으로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생계를 위해
개미같은 일상생활을 반복하는것에서도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아픈 노모를 모시는것에서도 내가 이렇게 하는게 정상인지조차
구분이 안가는 안개속이고..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가장으로서 하는 처신도 옳바른것인지에
대한 개념도 사상누각과 같다.
이런 안개속 사상누각을 헤메고 다니는 나는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왜 나는 많은 나이 임에도 항상 정신적 안정을 찾기에 버거워
해야만 하는것일까.
태초부터 하느님 제작당시부터 하자가 있는 제품이라서 인가..
이렇게나 써먹고나서 애프터 서비스를 신청하면 받아 들여 질까..
갈수록 세상 살아 가기가 겁이 난다.

미안해요..
당신이 어머님 때문에 고생하는거 알고 있고..
그로해서 내가 좀더 부드럽게 대해줘야 하는데 미안하오..
하지만 내가 머리 아프다고 한건 당신이 몸이 안좋다는것에 대한

불만같은건 절대 아니요..
내성격 알면서..그냥 걱정 되고 안타깝고 한게 그렇게 표현
이 나왔을 뿐이요.. 점심때 사다준걸 먹고 더 아프다고 하니
무심결에 나온말일수 밖에 없었소..
그리서 저녁 어머님 계신 병원엔 혼자 가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그런데...엘리베이터에서 당신이 한말이 정말 내 신경을 있는데
로 긇어 댔어요...정확한 단어는 기억에 없는데...그말에 왜 그
렇게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13층으로 올라왔다. 바로 성질 누르고 다시 나갔는데 가버렸더라구요...
고생해서 몸에 병까지 난사람한테 잘해야 하는데..나두 왜이리
생겨 먹었는지 잘 모르겠구려...
너그러운 맘으로 용서해 주구려..어찌하겠소 소심하고 남에맘
챙기지 못하는 성격...그리 생겨
먹은 사람이 이나이에 금방 고쳐 지겠소...나두 우리 가계에 내려오
는 무심하고 툴툴거리는 말투 고쳐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돼질 않는구려..
아침에 혼자 나오면서...후회를 많이 했어요..조금만 참고. 같이
병원을 다녀 올껄..하면서..다시한번 미안해요... 자기성격
하나 컨트롤 못하는 사람을 애처럽게 여겨주시고 ...
꼭 약먹고 무리하게 밥먹지 말고 죽 배달 시켜서 먹도로 하요.
빈이 감기도 걱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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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멍해진 머리-집사람은 나의 거울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과 같이 잘 들 까닭이 없습니다.
아버님도 부모님이시지만
위 덩더듕셩
어머님과 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
아, 임(세인)이시여
어머님과 같이 사랑하실 분이 없도다.

 

내게 고려속요 사모곡을 읽어볼 자격이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신지 이제 열흘이 넘어 섰다.
지금까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을 위안삼아 왔다.
늑막 조직에서 음성판정이 나왔다고 했었다.
기관지, 폐를 통한 내시경 검사는 좁아진 통로로 인해 불가
했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 가슴을 통해 바늘을 넣어 직접 폐로부터 조직을
떼어냈다.
6시간여를...기흉을 걱정하여 움직이면 안되었다.
통증은 없으시다고 했다.
결과는 일주일 이상이 걸려야 하니 일단 퇴원한후 설명절을 세고
보자고 했다.
퇴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오늘 집사람이 병원으로 갔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시사를 한후 전화기를 보니 아내로 부터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뚜루루...
"여보세요..."
전화를 했었냐고 했더니...울먹거리며 아내가 말을 했다.
월요일 내시경시 나온 분비물을 검사했는데 거기서 조직이 발견
됐다고 하며 울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이제 어떻게 해..."
순간 말문이 막히며 정신이 멍해 온다.
전화기 너머 울며 말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나의 눈에도 물기가 고였다.
어쩌지...하며 있을때..
오히려 내가 아내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떻게해..병원 입원하셨다. 퇴원 하셨다 하면서 모셔야지...할수 없지.."
일순..생각해보니...나보다 아내가 어머니를 더 생각 하나보다.
세상에 시어머니가 암이라고 눈물 흘릴 며느리가 요즘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멍해진 머리속에 집사람이 나의 거울이구나 라는 생각만 떠오른다.
그저 고마워해야 할뿐...
어머니가 자식복은 없으셔도..며느리 복은 있으시니 다행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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