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를 맞춰 무엇이 잘못된건지 본질을 보는 힘
(지시가 아니고 그 태도, 언행이 문제)

전제조건:
공사건물의 계약전력이 설계서에 따르면 12000KW라고 했다.
그렇게 한전과 공급전력에 대해 대관 업무를 하고 있는데 
발주사 사정으로 새건물 하부로 구건물의 전력을 추가로
공급하기로 결정이 났다.
한전에 계약전력 상향을 요청 했으나 공급여건을 가지고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한전에서 10000KW밖에 공급을 해줄수
없다는 추가 회신이 왔다.

현수퍼는 오늘도 업이 되어 있었다.
전기파트를 모아놓고 자기가 쓴 일지를 보면 계약전력
부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거기에 집중을 할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계약전력이 현재 12000도 모자라 증설을 요청해야 할판인데
한전에서 10000밖에 줄수 없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12000부하를 10000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 보세요.
하이이사는 속으로 이거 말도 안되는 내용 아닌가 하면서
그건 부하를 축소하는거 외에 다른 방안이 있을수 없는거 아닌가요
라고 수퍼의 말끝을 따라 잡아 말했다.
현수퍼가 약간 당황하면서 그래도 방안이 있으니 수변설 설비
계통도를 알아간다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하이이사는 방안은 한전전력 증설, 부하감소, 다른곳에서전력추가
등 3가지 방법이 있는데 현실적인건 부하감소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현수퍼가 꾸덜거리며 인터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이이사는 현수퍼의 그 오만하게 너희들이 뭘알아 내가 시키면
그런줄 알아야지 하는 야릇한 그의 표정과 태도가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물론 배우는 입장에서 그런 감정은 어느정도 감수할줄 알아야
하지만 반복되는 현수퍼의 건방진 태도가 그의 감정을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하이이사는 우산을 들고 시공사등에 부하는 그대로 인대 수전
전력을 줄여 사용할 방법이 있냐고 그런 방법이 있다면 
아마도 노벨상감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보았다.
다들 부하감소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의견 회신이 왔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오니 현수퍼와 인터가 무언가를 계속
속닥거리고 있었다.
인터라는 인간은 짧은 복무기간이라며 일은 현수퍼가 시키는것만
간단히 하고 하루종일 기술사 공부에 매진하는 부류였다.
그런그가 발전기를 돌려 부족한 사용전력을 공급하는데 그게
신기술이라고 대단한걸 알나낸것 마냥 의기양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해당기사의 주소를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CTTS 비상발전기 자원화 핵심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있었다.
CTTS라는 장비는 ATS 기능과 동기화 기능이 함께 들어있는
무정전 절체 신기술의 결합체 정도로 기술되어 있었다.
CTTS-P 만 있다면 한전전력과 발전기간 계통화를 이뤄
부족한 계약전력을 채울수도 남는 전력을 팔수도 있다는 내용
이었다.
하지만 하이이사는 아직도 많은 의구심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발주처에서 부하에 맞는 전력을 확보 못하고 비상발전기의
개념을 뒤업고 상용발전기화 하는것에 동의 하냐가 그중 하나이고
신기술이라는게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인데
안정화된 기술인지도 다시 검토돼야 하지 않을까
거기다 현수퍼는 피크가 만에 다가갈때만 발전기를 가동한다고
하는데 원래 부하가 만이천을 넘게 설계되어 있는것에서
만을 기준으로 하는건 그냥 계산상 비상발전기를 일년내내
돌리겠다는게 아닌건지
그럼 거기에 드는 발전기 유지보수 비용과 기름값등에 대해서
발주처와 협의를 해본건지 등이다.
하이이사는 이렇게 불안정하게 전력을 공급하기보다는
구건물 현재 계약전력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신건물만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하이이사는 이렇게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데는 달리 이견이
있을수 없지만 계속해서 이어진 현수퍼의 건방짐에 대해서는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다.
발주처 문서한건 작성할때 칸띄어쓰기 부호하나까지 일일이
간섭하는가 하면 통상적으로 이어쓰는 문장은 남의 자존심까지
밟아가며 굳이 끊어서 가야하는게 맞다고 강요를 해댄다.
또한 관련자료를 다른분야에 전달하라고 해놓곤 상대방이
자리에 장기간 없어 정해진 기간내 전달하기 위해 일부를 카톡으로
보내자 해당 사진파일을 삭제하라는 엉뚱한 생고집을 
피우기도 했던것이다.
그렇게 이것저것 까다롭게 할거면은 본인이 다하던지
아니면 일부터 열까지 이건 하면 되고 저건 하면 안되고를
정해 놓던지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 하이이사는 기분을 전환하고 
그냥 좋은게 좋은거니 남은기간 잘있다 가는게 정답일거라고
곱씹고 있었다.

포커스를 맞춰 무엇이 잘못된건지 본질을 보는 힘
종료

 

 

이곡은 Adieu Jolie Candy이다.
1968년 프랑스의 미쉘 베르제가 작곡했다.
원래 가사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가사 없이 
프랑크 푸르셀이 연주한것이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의 타이틀로 더 유명하다.

아디오 졸리 캔디 (오늘따라 더보고싶은 형)

이 연주곡은 내게는 소음이자
고통이었다.

이 연주곡은 내게는 현민이자
이종환이었다.

이 연주곡은 현민에게는 삶의 일부
이자 노동가였을 것이다.

이 연주곡은 내게는 피붙이이자
서울의 단칸 셋방이었다.

이 연주곡은 내게는 만화이자
공돌이 였다.

이 연주곡은 내게는 수다스러움이자
미움이었다.

아 이제 이연주곡은 나에게는 뻥뚫린
구멍이다.

아 이제 이연주곡은 구멍속으로 불어오는
그리운 바람이다.

아 이제 이 곡은 보고 싶어도 
다시 볼수 없는 허상일 뿐이다.

아 이제 이 곡은 다시 가고 싶어도
돌아갈수 없는 과거일 뿐이다.

아 이제 이 곡은 가슴 한편을
아려오게 할 뿐이다.

아 이 곡은 보고싶고 가고 싶어도 다시 갈수 
없는 뻥뚫린 구멍속 냉골 바람일 뿐이다.


나를 불편하게 한 인간들 6편
김재운



이번 편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고 숨겨 버렸으면 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내 인생살이 중에서 나에게 가장큰 충격파를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통신사에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처음으로 발령받은곳은 수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발안이라는 곳으로 정말 작은 읍소재지였다.
그 곳에선 방을 얻어 자취를 하기도 하고 전기실 교대근무로 시간이 널널해진 후엔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여러해 동안 집가까운곳으로 발령 내줄것을 정식절차를 통하여  신청하여 7년만에 
평택으로 전근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곳도 안성에서는 30여분이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 였다.
시험실을 거쳐 선로과 사무실에서 근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모처럼 열린 노조
집회현장(조계사)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토요일에 갔다 일요일 일찍 돌아왔지만 너구리처럼 냄새를 잘맡은 것인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스너프과장(조애자 남편으로 얼마전 본인이 사망한것으로 부고가 올라왔음)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내 토요일 행적을 알아냈고
그바람에 나는 안성과는 반대방향인 안중이라는 곳으로 집에서 더멀게 귀양을 가게 됐다.
회사방침으로 노조관련 집회에 참석한 죄로 책임추궁을 당하는건 어쩔수 없다고 해도 
정말 억울한건 같이 노조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 누구는 귀양을 가는데
일부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멀쩡히 자기부서에 온전히 보양 하면서 노조활동으로 인한
인금인상등의 과실은 공평하게 적용받는다는데 있었다.
부가적으로 더욱 울화가 치미는것은 노조가 노조원들을 충동질해 집회를 가졌으면 노조원들을
어느선에서는 지켜줄줄 알아야 하는데 중앙의 강성 노조와는 달리 각 지사에 있는 지부장들은
여전히 지역 간부들에게 부화뇌동을 하는경우가 흔했다.
안중에서는 사무실일을 포괄적으로 하게 되어 혼자 이리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나몰라 하는 자들은
탱자거리며 전기실에 모여 고스톱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숨이차게 힘들었던 그날 나는 꼭지가 돌아버려 심한 소란을 피웠다. 
그때 출타했던 지점장이 돌아와 나에게 연유를 물어왔다.  
그당시 지점장 윤용식은 쉬쉬하면서 적당히 무마시키고 싶었겠지만 근무시간중 노름과 관련된 
내용이 평택지사 또는 본부까지 새어나간다면 본인을 포함한 그지점 주요인원들이 무사치 못할것을 
아는 능구렁이 였기에 어떻게 손을 썼는지 나를 달래는 차원에서 안성으로 발령 내주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집근처로 오게된 나는 전력실에서 어느정도 근무를한후 내가 주특기로 삼고 
싶은 전송실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게 나중에 불행의 시초가 될줄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안성 지점에서의 업무량은 회사가 전직원의 영업화를 극심하게 몰아부치던 시기로
본업보다는 아파트 등에 나가 영업활동을 하며 상품판매에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는 작은 시골로 발령 받은 지점장, 과장등이 더큰곳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필요이상으로
직원들에게 영업판매건수를 할당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확인은 할수는 없었다.
그당시 전송실의 실장은 양인덕으로 나와 동년배로 발안 있을때 교육을 받으러가면서 몇번 
만난적이 있던 사람이었었다.
그가 선로과 대리로 있던 김재운이 기계과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사무실 대리로 가게 되었다.
어느날 양인덕이 나를 불러 전송실에서 실장을 맡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이곳에 근무한지
얼마되지 않아 시설에 대해 잘알지 못하니 이곳에 대해 잘아는 사람들중에서 선택하라고
간청 했으나 그는 나를 실장자리에 올려놓고 말았다.
불안해 하던 내생각대로 실장업무를 맡자마자 일 관련문서가 쏟아졌다. 
전송쪽에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안성 관내의 광케이블
내역을 전수 조사하여 입력하라는 내용이 대다수 였다.
나중에 안사실이지만 광코아 시스템 입력은 오래전부터 있어온것인데 양인덕이 차일피일 
미룬것인지 전혀 진척이 안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안성 전송실에 실질적인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시간을 같지 못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광코어 선번장의 내역을 실제와 대사를 해보았지만 실제 입력해야하는 내용과 많은 차이점이
있어 이를 어떻게 대사해야하는지 얼마간 고민에 빠질수 밖에 없었다.
작업하다 안되면 평택지사 전송실에가서 일을 배우고 올까도 생각 했지만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송실 직원들에게 물어 봐야 늙은 여우 조씨와 오래근무했지만 수박 겉핡기만 
한이들이 내용을 알리 만무 했다.
그렇게 광코어 입력에 대해 늦게까지 고민을 하고 하고 있을때 김재운과장으로
부터 전화가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이자식 저자식하며 왜 전송시스템 입력이 늦어지고 있냐며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업무 부담에 대한 스트레스로 과부하 상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욕까지 듣고 있으려니 눈앞이 캄캄하면서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방향을 잃어버리고 
멘탈이 나가고 말았다.
줄기차게 땍땍거리던 김재운이 당장 올라오라고 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가 손을 올리고 
나를 때릴것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며 그대로 원투 펀치를 날리고 말았다.
이는 멘탈이 나간 상태에서 발생한 몸의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런후 직원을 때릴려고 까지 하냐는 생각에 있는 속에 있던 악다구니를 모두 토해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송실 쇼파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온몸에 열이 화끈 거리고 있었다.
잠시후 노조지부장 백봉현이 나를 찾아왔다.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지금 김재운 과장이 병원으로 갔고 눈을 다쳤다고 했다.
그는 평택지사에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 사유서를 적으라고 했다.
식지않은 열기속에 끙끙거리며 지금까지의 상황을 세세하게 있는그대로 작성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이렇게 작성하면 나만 잘했다는게 되니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식으로 작성하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인사위원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리고 김재운은 천안 단국대학교에서 안와골절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폭행이라고해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수백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표를낼 각오를 하고 연차를 내고 집에 있는데 평택에서 모대리(얼굴은 떠오르는데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가 왔다.
커피숍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 했다.
그가 말했다 뭐하러 사표를 내냐고 그냥 처분 받고 다니는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지금에서의 생각이지만 이때 이말을 해준 그분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후로 애 업은 집사람이 천안 단대까지 김재운 병문안을 가고 치료비까지 냈다.
지금 생각이지만 본인이 자기 직원의 일에대한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그치기만 
했다는 일말의 죄책감으로 그때 그냥 공놀이하다 맞았다고 했으면 눈치빠르지 않은 의사라면
의료보험이 적용되 치료비가 경감이 됐을텐데 ...참 이부분이 다시한번 괘씸한 부분이다.
하긴 부하한테 두들겨 맞은것도 쪽팔리는데 놀다가 다쳤다고 속이고 치료비를 
낮춰줄 이유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을 게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는 3개월의 징계를 받았고 김재운은 그후로 몇년동안 과장이라는 
보직을 맡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부장이라는 작자들은 간부와 직원의 싸움에서 징계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하는데 정말인지는 알수 없었다.
그일이 있은후 안성에서는 당연히 근무를 할수 없었고 송탄으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몇년동안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던가 간부라는 자들은 모두 같은 편이라 나만보면 성질
더러운 놈이라고 서로 정보를 공유 했다는 정황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가니
송탄의 지점장이 발령 첫날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것 또한 상당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전송실 신실장에게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직장에서 높은 보직을 맡지 못한것은 이때의 김재운과의 악연이
가장 컸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 것뿐이겠는가 이 사건은 나의 인생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에 대한 불이익으로 
알게 모르게 고생을한 집사람에게 무척이나 미안하고 안됐다는 생각을 잠시도 떨쳐 버릴수가
없게 되었다.

나를 불편하게 한 인간들 6편
종료

 

 

무력감을 어떻게할까

나이가 하나에 하나를 더해가고 있다는걸 느끼면서부터 무력감은 나를 휘감고 있다.
교육사이트에서 점수 하나 더 받으려고 노력하거나
상품판매를 위해 지인들에게 설명하거나
연말에 고과점수에 연연해 정제된 실적을 작성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것이 부질없다는 관념이 고정화 되어 가고 있다.
주중엔 억지로라도 돈벌이에 필요한 행동등을 하고 있지만 
주말엔 그저 누워서 자연인 프로그램을 찾아 보고 있다.
그러다 다른 구성원에게 채널 사용권을 빼앗기면
그저 밥먹고 누워서 너투브를 무의식적으로 시청하는거외에 하는게 없다.
몸은 천근만근 내려 앉아 일어서길 거부하고 무력감에 자다 말다 비몽사몽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알수 없게 주말이 지나가 버리고 만다.
비들비들 말라가던 생명력은 점점 비틀어 지고 있다.
월요일 아침 전동차에 올라타 간신히 차지한 자리하나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 들른후 현장 점검에 나서서는 그저 틀에 박힌 대로 하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들어와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점심엔 치통이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부드러운 스파게티가 나왔다.
휴식시간에는 무기력할때 도움이 될만한 철학자 명언을 AI의 도움을 받아 기록 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테로스, 카를 마르크스의 무언가 적당했던 단어들은 머리속을 맴돌뿐
딜리트키 한번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오후에 소장이 와서 현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고 나자 정신도 좀 들고 무력감이 약간이나마 치유된듯 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력감의 반대말은 명언이 아니라 열정이 맞지 않을까 한다.

무력감을 어떻게 할까
종료

 

 

25년을 다닌 직장에서 퇴직하고 전기라이선스를 획득한후 다니기 시작한 관리업(시설업)은
일년이 되면 더다닐수 없는 여러가지 사유가 발생한다.
1.저세대수 공동주택의 소장이 자기가 격투기를 배웠고 자기 가오에 흠집을 내는 직원들은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성격으로 사극에서 보면 말년의 궁예를 떠올리게 하였다.
2. 천세대가 넘는 공동주택의 경우로 세대가 많아서인지 말도 많고 탈도많았다.
전임회장과 신임회장간에 장기간에 걸친 법적권력투쟁으로 관리소가 혼란하기 이루 말할수
없었다.
소장이 몇명 바뀌면서 안정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동대표들간에 알력싸움과 검은돈을
받아먹은 자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 도저히 다닐수가 없었다.
3. 광교산 자락의 테라스로 여자소장이 회장과 들러붙어 자신의 보신에만 신경을 쓰고 광활한 조경면적의 
제초, 예초작업을 과장에게 덤태기 씌우는 바람에 체력적으로 너무 힘이들었다.
4. 지식산업센터였는데 모처럼 마음에 맞는 남자 소장이 있어 괜찮았다.
하지만 6개월후 집이 멀다는 이유로 그소장이 퇴직하고 후속으로 여자소장이 왔으나 게시판 행정능력은
있으나 다른부분은 문외한으로 기술부분에 지나친 간섭을해 업무에 집중할수 없었다.
5. 이곳역시 지식산업센터로 소장은 모든 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일하기는 좋았으나
일순간의 방심으로 관리업체가 변경 되어 만 이년 만에 그만둘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부분의 일자리로 옮긴 현재 만 일년이 넘자 또다시 이곳이 싫어지고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내부로 부터 용솟음 치고 있다.
일에 대한 매너리즘이 발생하고 주변에서 까다롭게 구는 관련인이 있고 새벽에 일찍 출근을 해야
한다는 점이 그 언저리에 배치하고 있다.
어찌됐든 일년이 되면 그일과 주변이 싫어져 다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어쩔수가 없다.
그렇다고 임기가 보장된 기간을 채우지 않고 그만둘수는 없으니 그마음속은 연옥으로 다가가고
있을뿐이다.
이유불문하고 이곳에서 무사히 경력을 쌓고 순조로운 삶을 이어나갈수 있게해주길 소망해 볼 뿐이다.

장기근속을 위한 마의 구간 일년. -종료-

 

지난주부터 공장검수가 있으니 참석할 사람은 신청하라고 했다.
우리분야는 4명이고 발주처에서 많이 참석을 하니 안내차 선임은 무조건 가는게 순리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는 사람이 없으면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선임과 새로 들어온 사람이 해당분야 담당이라고 간다고 했으니 나는 참석하지 않아도 됐다.
나의 생각으로는 2명이 참석하고 근무처에 2명이 남아 있으면 아주 적당하다고 여겨졌다.
물론 나는 안가는것으로 보고가 됐다.
어제였다.
선임이 전화를 하는데 옆에서 들으니 나두 참석한다고 말하는듯 했다.
그말을 같은 듣던  보고자가 안가신다고 한거 아니었냐고 물어왔다.
잠시 나갔던 선임한테 나도 가는거냐고 물어보자 발주처에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나는 어쩔까 하다 말많은것이 싫어 오전중에 끝날거 같으니 나도 참석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사달이 났다.
단장이 와서 남아 있겠다고 하던 젊은 감리원이 휴가를 냈으니 3명이 다가면 안되고
한명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난처해진 선임이 사다리 타기를 하자고 했다.
내가 선택한 라인은 참석한다였고 선임도 참석에 선택됐다.
새로들어온 감리원이 꽝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선임이 한다는 말이 담당이 못가게 생겼다고 흘기듯 말했다.
나같은 경우는 원래 갈생각이 없었고 선임의 말때문에 바뀌게 된것이었는데
이제는 담당도 아닌게 가겠다고 하는 파렴치한 같은 입장이 되고 만것이다.
점심식사전 새로운사람한테 가시라고 말하고 나는 빠지는것으로 했다.
점심을 먹고 오자 선임이 뜬금없이 공장검수 체크리스트를 뽑아 보라고 말했다.
나는 선임과 담당인 새로오신 분이 가는게 맞다는 말을 두번째로 해야만 했다.
참말로 나의 마음은 원래 안가려고 했는데 타의에 의해서 간댔다 안간댔다 횡설수설하는
지선상의 아리아 아닌 오르락 내리락하는 공장검수상의 아리아가 되고 말았다.
참나원 마음이 썩 즐겁지는 않다.
진작 확실한 입장들을 말했으면 이렇게 몇번씩 횡설수설할 일이 없었을텐데..
젊은 감리원은 그날 휴가를 낼꺼라고 일찍 말하던지...
선임은 한사람만 남고 다가라고 진작 말하던지..
왜 두사람의 갈팡질팡 뜻때문에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지 정말로 알수 없는 노릇이다.
에휴!!!!!.

오르락 내리락 검수상의 아리아. -종료-

 

십이월 일일 추운날씨에 귀마개를 하고, 천안천으로 걷기운동을 하러 나섰다.
바람이 막힌 햇볕드는곳은 따듯했으나 그렇치 않고, 바람이 불어대는 장소는 귀가 떨어져 나가는 차가움으로 귀마개를 벗을수가 없었다.
되돌아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그래도 나선 발걸음이니 삼십분정도는 버텨 보자고 냇가를 걸었다.
그러다 반가운 오리 두마리를 볼수 있었다.
작년 겨울에 보았던 오리를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작년 십이월부터 이곳으로 출퇴근을 했었으니 거의 만 일년이 되어 간다.
그때의 혼란스러움을 생각하면, 이곳으로 다닐수 있다는 것은 거의 파라다이스에 가까웠을 것이다.
말이 과장이지 잡부 취급을 받는 관리업에서, 건축분야로 일자리를 옮긴다는데 대해 아주 큰 메리트가 느껴지니 왜 아니 그랬겠는가.
그러면 지금 현재는 어떻냐고.
흐흐흐. 말하긴 좀 그렇다. 내가 조변석개는 아니지만, 이분야로 와서 내부사정을 많이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이곳도 실망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는점은 부정하지 않겠다.
이분야도 돈버는 직업이긴 마찮가지로 발주처의 통제를 강하게 받고 있어서, 밖에서 들어왔던만큼은 자유롭지 않을 뿐더러 최근의 건축현장 사고로 인하여 감리의 책임은 더욱 더 커지고 있다.
또한가지 감리에도 등급이 있어 특급,고급,중급,초급이 있고 왠만한 현장을 책임 지려면 특급이 있어야하지만, 이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기술사라는 최고난도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물론 전에는 기사를 획득하고 경력만으로 특급이 주어지던때도 있었지먼 현재는 먼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연봉도 관리업에 비해 아주만족스럽다고는 할수 없으니 점점 메리트가 떨어질수 밖에 없다.
기술사 라이선스를 갖고 특급을 한다 해도, 연봉이 매력 없는 수준이니 젊은 사람들이 이분야에 발을 들여놓는것에 대해서는 적극 반대의 입장이다.
나이를 먹고 적은 임금으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질즈음 입문을 하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또하나 이야기 한다면 그래도 관리업보다는, 직장같은 분위기가 강해서 쪼금 상위레벨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이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수 있으니 강요할수는 없겠다.

천안천의 오리와 얼추 1년간의 소회. 종료.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남과 비교해서 불행해지지 말자는 말을 젊어서는 쓸데없는 내용이라고 치부하고는 했다.
좀더 높은곳으로 향하고
좀더 돈 많이 주는곳으로 가고 싶고
좀더 희귀한 자격증을 획득하고 싶어해야 했다.
항상 불평불만으로 가득차서 살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남들은 쉽게 오르고, 획득하고, 돈을 버는듯 했다.

그러다 가장 중심이 됐던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 퇴사하게 되면서, 선배의 밖이 얼마나 혹독한지 체감을 해보라는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일단 실업급여 팔개월을 다 받으면서, 나이먹어서도 취업이 잘된다는 자격증에 매달렸다.
다른분들 말에 의하면 가장 어려운것중에 하나라고 했다.
하지만 간절하면 이루어 진다고 했던가
그래도 남들보다 빠른시간안에 그것을 취득할수 있었다.
그리고 전직장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을 할수 있게 되었다.
기어들어가던 목소리도 다시 힘이 차고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던 처량스럽던 차임벨 소리도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 기대치를 충족하기엔 너무 부족한 직업 인프라가 발목을 잡았다.
좀더 나은 위치를 잡아 보기 위해 다른 자격증도 획득 하였고
모든이들이 선망의 대상에 따기만 하면, 연봉 일억이 된다는 꿈에 도전을 해보았다.
하지만 기억력도 떨어지니 일차 필기까지는 어찌 어찌 올라 갔지만, 그다음 주관식 시험이 문제였다.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힘이 부친다.
만약에 첫자격증 처럼 애절했다면 학원도 다니고 정말 진정하게 
노력을 했다면, 가능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틀린것이다.
하기 싫었다.
공부자료도 인터넷에 떠도는 옛날 자료만 가지고 했으니 수시로 변하는 법을 따라 갈수 있겠는가.

누군가 나이먹어 뭐하러 그리 머리를 싸매고 있냐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좀더 신수가 편하다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에 와서 말하지만 이게 신수가 편한건지는 잘 모르겠다.
남하고 비교하지 말자고 하지만,
주변에 있는 좀더 높은 자격증을 갖은 이들이 있고,
능력이 모든면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보면 지금이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대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몸도 약해지고 있는데, 내가 얼마를 더산다고 그짓거리를 할까 멈칫한다.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도 정하기 어렵다.
그냥 지금것도 멈추고 자유롭게 살면 안되는 걸까?
주변사람들의 잘남을 더이상 알고 싶지도, 부러워하지도 말자고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데 잘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멍하니 있다가 문득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싶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알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알아야 하고
접해야 한다.
이런것들 말이다. 상조회사, 장례식장, 납골당, 묘소, 공원묘지, 제례, 2일장 또는 3일장, 화장장등
평소 입에 올리기 조차 어려워 하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하나둘 철저히 준비를 하기도 하지만
젊어서는 아니고 나이들어 가면서 어쩔수 없이 알게 되는것일 게다.
상조회사에 가입하는것이 좋은것인지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처리 하는것이 나은 것인지 말이 많치만
어찌됐든 이런일을 당하면 잘아는 분들의 조언대로 절차를 진행하고 마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 부모님을 하늘로 보내 드렸을 경우에는 이것 저것 행정 절차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사망 신고 부터 통장 정리, 그리고 정리 되어 있지 않다면 재산 상속등에 관해서도 머리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고 마무리 지어여 한다.
나의 경우는 TV에서 나오는 상조회사 광고를 보는것이 너무 싫다.
나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때 상조 회사를 이용 했지만 그냥 싫다.
짧은 순간이지만 채널을 돌려 버리기 일수다.

8월 7일 오후 3시경 이제부터는 무더위를 날려 버릴수 있는 (입추) 일요일 오후를 느긋하게 TV를 보며 
보내고 있다가 집사람의 날카로운 소리에 제정신을 차렸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말한것 같은데 평상시 지도자 같은 말의 톤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은 이번주 강원도 정선으로 친구분들과 물놀이를 가셨다고 했는데... 물에서 사고가나

병원에 계신가 하다가...

이어지는 집사람의 통곡 소리에 뭔가 잘못 됐다는걸 알수 있었다.
가슴을 두드리며 울던 집사람은 가슴이 아프다고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
큰처남이 절차를 위해 정선으로 가고 있다고 하고 막내처남과 처형도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보고는 집에 있다가 평택으로 가라고 했다.
친구분들과 민박집에 도착 식사를 하시고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신발이 떠내려가 그것을 쫒아 물에
들어갔다 심장마비가 오셨다는게 정리된 내용 이다.
집사람이 어린이집 정리 할게 있다고 가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는 살겠다고 일을 하러 가고
있다고 탄식을 하였다.
그순간에 나는 뭔가 찔리고 괜스리 미안했다. 미안해..어쩌나...
평택에 도착하니 장모님과 막내 처남이 제천 처형네 가 있어 비어 있을줄 알았는데 눈가가 붉어진
큰처남 아들 태준이가 있었다.
장인어른은 법적 절차가 남아 이동이 11시 가까이 돼서야 승인이 떨어졌다.
새벽 2~3시경 장례식장에 도착..큰처남이 3일장을 치르기로 했다.
8월9일 입관절차때 직계 자손들의 큰 슬픔은 장례식장을 뒤덥고도 남았다.
그리고 3일밤을 장례식장에서 보내면서 큰처남과, 둘째 처남의 인맥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장례 화환만 70여개 가까이 왔으니 옆호실과 작은 복도를 나눠사용하는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8월10일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한 운구차는 아파트를 거쳐 천안 화장장으로 향했다.
집사람과 처형은 쓰러질듯 울어 댔다.
집사람의 가슴을 보니 하도 두드려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큰처남도 좀더 잘해 드릴껄 하면서 울고 있었다. 내가 등을 두들기며 충분히 잘하셨으니 너무 자책
하시지 말라고 위로 해 드렸다.
장인 어른을 평택시립추모공원에 모신후 각자의 집으로 갔다.
그날 저녁 형제중 일부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테스터기로 감염 여부를 조사 했으나 모두 음성이 나왔다.
다음날 삼오제사에 큰처남이 오지 말라고 했으나 걸린 사람 빼고 추모공원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먼저 도착해 제사장소를 정리 하고 준비상이 오자 제사를 지냈다.
음복을 해야 한다고 하여 모두 한가지씩 음식을 먹었으나 나는 입맛이 없어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 코로나에 안걸렸던 사람들이 모두 감염이 되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인지 나는 4번에 걸친 테스트에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금요일 집사람과 둘째딸이 병원으로 가 약을 타왔다.
목아픔, 약간의 기침, 몸살끼등이 있으나 약을 먹으나 많이 좋아 졌다고 했다.
16일 출근한후 집사람이 보내준 동거인 수칙을 보니 해당 보건소에 가서 PCR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 이야기 한후 팔달구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고 다음날 결과를 받아 보니 음성 이었다.
다시 출근한 사무실에는 평소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던 사람들도 입을 막고 있다.
속으로 괜히 검사 한다고 하지 말것을 했으나 말해주는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 했다.
평택시에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물놀이 사고 보험이 가입 되어 있다고 형제들의 인감증명서가
필요 하다고 한다.
요즘 자치단체는 예전과 달리 시민을 위한 일을 많이 하는듯 하나 아는 사람만 누릴수 있으니
이는 시정이 필요 하겠다.
아니면 혼란스런 틈에도 관공서에 여러가지를 알아 봐야 하니 이는 불합리 하지 않는가
아무튼 장인어른 장례와 코로나로 정신없이 8월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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