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시작해 3년을 보낸 장소들이 몇년후엔 추억의 장소로 떠오를수도 있겠다. 아마 이곳을 떠나면 다시 올일은 거의 없을것이다. 고뇌에 찬 세월속에 나를 3년간 존재하게 해준 고마운 장소들이니 기억속에 담아 보내고 싶다. 순천향대 새병원 건물과 그 옆으로 신축 아파트가 보이고 있다.
우측으로 몸을 틀어보면 천안역으로 향할때 걷던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는 3년간 회식을 했던 장소들이 있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봉명이었지만 그래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으니 마음이 싱숭생숭 한 주말인데 가족들이 넷플릭스에서 파일럿을 보고 있었다.
별로 안땡기는 한국식 코미디 영화지만 커피한잔 하면서 옆에 앉아 곁불쬐듯 보기 시작 했다. 이렇듯 서론이 긴 이유는 요즘들어 유투브에 중독되어서 인지 장편을 보려고 하면 초반을 이겨내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면 영화 한편 보는데도 노력이 필요한데 친인척 중에 대한항공 파일럿이 있으니 그로인해 별 노력을 안해도 초반을 넘길수있었다. 회식자리에서 요즘같은 세상에 여성에 대한 잘못된 발언을 한 파일럿이 회사에서 짤리게 되고 그로인해 이혼까지 당하면서 동생이름으로 여자 파일럿에 도전한다는 내용 이다. 중후반까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럭저럭 볼만한데 이런류의 영화에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웃음과 진정어린 감동까지 두마리의 토끼를 잡아 보려는 감독의 눈물어린 노력이 오히려 전반적인 영화의 재미를 반감 시킬수 있지만 이영화는 그래도 어느정도 자제를 하는 듯 하여 만점에서 절반정도의 점수는 줄수 있겠다.
8월 하순에 식재해 11월 임에도 불구하고 배추는 아직도 제대로 결구가 돼지 못하고 있다.
정보를 찾아 보니 결구 시기에는 매일 가서 물을주고 일주일마가 추비를 해줘야 한단다. 야매농부는 배추 잎이 짙은것만 보고 거름은 필요 없겠다 싶어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그건 아닌가 싶다. 정상적으로 크면 60일정도면 배추가 어느정도 큰다고 하는데 왜이리 안클까 올여름 너무나 더웠고 그로인해 벌레 피해도 상당했다. 남들은 심기전 거름, 비료, 칼슘, 토양살충제를 하고 한랭사 까지 씌운다고 하는데 야매농부는 제대로 해준게 없다. 그러니 김장배추 수확시기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배추를 뽑을 날은 아주 늦춘다 해도 이제 3주 정도 남았다. 어제는 퇴근한 어둑한 저녁에 급하게 텃밭으로가 비료와 물을 흠뻑 주고 왔다. 어쩔수 없는 야매농부의 특단의 조치였다. 이것으로 배추가 어느정도 결구가 이루어 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직장 출퇴근을 1호선 광역 전철을 이용해 하고 있다. 자동차 이용도 해봤지만 고속도로 이용에 기름값에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리는 장거리다. 요즘 전동차가 태업 중이다. 6시에 출근하는 아침시간대에는 별반 차이없이 다닐수 없어 큰 불편함은 없는데 문제는 저녁시간이 문제였다. 봉명에서 타야 하는데 매번 오후 5시경에 신창에서 오던 전동차가 거의 5시 30분이 되어서야 도착을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도 많아 앉아 가는건 꿈도 꿀수 없다. 수원까지 거의 한시간을 꼬박 서서가니 다리가 비비 꼬여 온다. 집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거진 7시다. 몇일전에 5시 부터 회식을 하고 좀 빠르게 전동차를 타고 집으로 갔을때 보다 늦은 시간이다. 어찌 정상적으로 퇴근을 하는데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갈때보다 늦는단 말인가 물론 철도 노동자들의 요구사항 관철을 위해 사측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퇴근시간의 지연은 나를 짜증나게 만들고 있다. 한시간 걸리던 퇴근길이 30여분이 더 걸리고 편하게 앉아서 가던 것이 다리가 저려 오도록 서서 가야 하니 참 불편하기 그지 없다. 거기에 지연되더라도 정확한 전동차 운행 시간을 알수 있으면 좋을텐데 역사에 가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짐작도 할수 없으니 더욱 답답할 뿐이다.
얼마전부터 SNS를 통해 시제에 참석하여 줄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계속 전달되어 왔습니다. 같은 지역에 사시는 당숙 아저씨께 연락해 보니 선약이 있어 가실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말에는 늦잠을 자고 싶다는 욕망이 대단했지만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8시에 진천을 향해 출발 했습니다. 고속도로 용인 부근에서 잠시 밀렸을뿐 제시간에 도착할수 있었습니다. 우선 실원리 초입에 있는 할아버님,아버님 묘소에 들러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아버님 묘소는 떼가 살지를 않고 아버님 산소에는 쑥과 칡이 제거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년 봄에는 다시한번 근사미 작업을 해야 겠습니다. 시제장소에는 아직 일러서인지 많은 분이 도착해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매번 손님처럼 왔다 가지 말자고 생각을 바꾸고 만나는 분들마다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드리려고 노력 했습니다.
오산 아저씨와 집안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안이라도 한분씩 사귀어 놓으면 좋을거 같아 옆에 계신 분과 연락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시제를 마치고 선수촌 근처 고기집에서 종친회에 참석 했습니다. 그동안 종친회를 이끌던 집행부가 임기를 마치고 활동적인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 하였습니다.
처음 참석한 종친회에 젊은 사람은 별고 없고 나이든 분들만 대다수 이니 문제가 아닐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심성의것 맨발걷기를 하다 추운 겨울이 다가와 더이상 어두운 밤에 맨발로 나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SNS상에는 핫팩을 붙히고 바닥이 뚫린 양말을 신고 하라는데 그도 쉽지는 않을듯 하다. 더욱이 혈압이 앉좋다면 새벽이나 저녁에는 더욱 건강에 좋치 않을것이다. 궁여지책으로 회사근무시 점심시간인 한낮에 나아가 바닥에 흙이 없으니 달리기로 대체할수 밖에 없는 처지다. 봉명역 부근에서 봉명교까지 철길 하부로 런닝을 해서 천안천에 도착해 1차로 팔굽혀 펴기 및 매달리기로 근력운동을 한다.
다시 숨을 고르고 다가 2교-다가교-천안고가교-용곡교 에 이르면서 달리기를 한다. 이곳은 전에 만든 이야기중에 피라니아가 있는데 거기 나오는 이자수청년이 만수사까지 런닝을 하지 않았던가
다시 되돌아 런닝을 마치고 나면 얼마전까지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흥건 했지만 쌀쌀해진 요즘엔 약간 덥다 할정도일 뿐이다. 물론 출반전과 운동후에는 준비운동과 마무리 운동을 갖춰서 시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 몸이 만들어 지지 않아서 조금만 달려도 숨이차고 힘이 들어 자주 멈춰 숨을 고르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 하고 있다.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고 3에서 4킬로 정도 이다. 그래도 다리에 힘이 오르는듯하여 맨발걷기를 못하여 하는 대체제로 만족감이 와 기분은 좋아지고 있다.
단독주택단지에서도 흔하게 볼수 있는 가을풍경에서 조기에 수확하지 않는다면 초겨울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는 황빛 과실수 이다. 또한 가로수의 잎들도 황금빛을 띄고 있으니 무언가 깊은 인생의 맛을 느낄수 있는 시절이다. 텃밭으로가 아직 결구가 모자란 배추를 보고 올해는 틀렸구나를 외치다 몇개남은 무우가 제법 크기를 자랑하고 있어 그래도 아기들 체험용은 되겠다싶어 안심이 든다. 그리고 한여름에는 심었다하면 벌레들의 공격으로 고사를 하던 열무의 최종버전은 어느정도 먹을수 있을 정도로 자라고 있다. 더 늦기전에 뽑아서 집에가져와 원장님이 피곤해 자는 동안 열심히 다듬어 흙을 씻어 내었다.
시키지 않는짓을 하냐고 화를 내던 원장님이 맛나게 담근 열무김치에 따끈한 햇살밥을 같이 먹으니 우와 이게 바로 꿀맛이로구나 가을의 정취도 느끼고 직접 기른 맛있는 열무김치도 먹고 있으니 이게 바로 소소한 행복일 것이다.
[남양홍씨 시조] (선 시조 10세) 몽주의 자 태사공(太史公) 홍 은열(洪殷悅)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 시조로 모셔 두고, 태조 왕건이 고려 개국할 때 개국공신으로, 태조로부터 직접 은열이란 이름을 하 사받았으며 고려 광익경제공신, 정1품 삼중대광과 태사의 자리에 올 랐다. 시조는 삼중대광(현 국무총리), 태사로 전하는 은열이다. “홍 은열을 일 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로 손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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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 공(홍 은열)의 6대손 충평공 관(灌)은 고려의 제1의 충신이자 명필 로서 보문각 태학사로 경학을 강론하신 탁월한 철학자이시다. 충평 공관의 5대손 광정공 규(奎)께서는 무신들의 횡포를 제압하는 공을 세웠다. 고려 왕권 1237년(고종24)~1306(충렬왕32) 홍자번 자 는, 운지 시호는, 충정/동지밀직 예의 아들, 문과에 급제, 남경유수, 판관을 거쳐, 광주통판, 충청, 경상, 전라안찰사, 호부시랑을 거쳐 1271년(원종 12)우부승선이 되어 왕에게 서정을 친히 보살필 것을 청했다. 1278년 지밀직사사가 되어 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로서 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원나라와 일본정벌 을 위한 전함의 수조을 담당했다. 1280년 지첨의부사, 세자 이사, 1284년 첨의찬성사, 1293(충렬왕19)왕이 원나라로 갈 때 서울을 유 수했다. 첨의중찬, 1295년 지도첨의사가 되었다가 이해 첨의중찬으 로 치사했다. 이듬해 상의도첨의사사에 이어 중찬으로 편민십팔사를 왕에게 조진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좌복야, 참지광정원사를 거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조사가 되었다. 충렬왕 이 복위하자 공신의 호를 받고 1300년(충렬왕26) 판중군사가 더해졌 으며, 1303년 충렬,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킨 오기, 석천보를 잡아서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이해 도첨의 좌중찬이 되었다. 1305년(충렬왕31)경흥군, 자의도편의사사가 되어 원나라에 가는 왕을 호종, 이때 왕유소, 송민 등이 충성왕의 측근에 서 갖은 흉모로써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두 왕을 모시고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 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봉되고,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광정 공은 두 따님(충선왕비, 충숙왕비)의 국혼으로 남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익주를 남양부로 승격 공의 식읍으로 삼으니 이때부터 관향이 남 양 홍 씨가 되었다. 이후 고려왕실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조선조가 들어설 때 잠시 큰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태조가 큰 뜻 을 이룬 후에는 남양홍씨 가문을 회유하기 위하여 수교로서 태사공 의 후손은 누구나 다 병역과 부역을 면제하고 관노나 천한 일에 부 릴 수 없도록 엄한 명을 내렸다. 이는 역대 조정에서 추인한 바다. 훌륭하신 선조님 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후손들과 유대가 돈독하여 주변의 으뜸으로 번성해 10대 명벌로 자리매김해왔다.
주는거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일개인이 편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해 그냥 싫어 하는거 아닌가 하는 뜻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람이 싫은건 어쩔수 없다.
처음엔 말수도 적고 일을 열심히 하는것 같아 나하고 레벨이 맞아 친하게 사겨 볼까도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얼마간 지나면서 보니 전혀 그렇치 않다. 그는 나보다 출근이 빠른 유일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먼저 인사를 했다. 그러던것이 어느때부터인가 일이 바빠서 일까 나의 반응 없는 메아리만 울리더라 그걸 지각하면서 부터 사무실 들어 설때 못본척 하고 들어선다. 그런 그가 자기네 파트 사람들이 오면 인사하고 말도 친절하게 건네더라. 그리고 20년 정도 차이나는 직원들과 저녁이면 술한잔 하는 모양새로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친절하게 하더라 물론 지방에 와서 원룸에 사는 사람들끼리 무료한 저녁을 같이 지낼수는 있지만 나이차가 심한데 너무 허물없이 지내는건 좀 그래 보인다. 그리고 다같은 일임에도 혼자 독판 뭘 열심히 하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판만 뚜닥거리고 전화로 현장 직원들과 큰목소리로 떠들어 댄다. 그러곤 현장에 수시로 나갔다 온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건 아니다. 그렇치만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에 잘보여 허울좋은 호칭이 올라가길 바라서 인지 왜 그렇게 몰입을 하는 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 어느정도 형평은 맞춰 가면서 하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모임때는 허울좋은 호칭에 비견해서 인지 남들 다아는걸 난척 하는 발언으로 토하곤 한다. 그냥 잘난척 하고 싶어하는건지 영웅심리가 있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다. 또하나 그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들에 대해 자신만의 룰을 만들고 남들이 그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잔소리하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 룰이 왜 지켜지지 않는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거기에 전에 내가 몸이 안좋아 알콜을 마시지 않았더니 자기는 그런사람 싫다고 하더라.. ㅎㅎㅎ 그가 술못먹는 사람의 고충을 알고는 있는건지 참으로 의구심 스럽다. 좀팽이 스럽지만 이렇게 이런저런 사유로 그냥 그가 점점더 싫어 지고 있다.
주말에 가을 단풍을 볼겸 강원도로 여행을 갔다. 평창숙소에서 나와 대관령 양떼를 보러가야 하는데 10여분 거리의 양떼목장으로 차를 몰아갔다. 날씨가 흐림에도 불구하고 목장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매표소 앞에서 메가폰을 들고 손님이 몇명인지 큰소리로 불러주는 아가씨가 당황 스러웠다. 강원도의 시원스런 공기를 마시며 목장 초입에 들어서면서 무리에서 벗어나 따로 혼자 노니는 범상치 않은 양을 보았다. 그가 어떻게 혼자 있을수 있는지는 바로 판명이 되었다. 나무로 된 휀스를 쉽게 넘어 버려 다른 구역으로 들어간 양은 또다시 자신의 무리로 가려고 전기줄 담이라고 여겨지는 줄로 구획된 휀스앞에 섰다. 몇번에 걸쳐 움찔거리며 멈춰서던 양이 마침내 높이뛰기 선수마야 도움닫기도 없이 전기휀스를 훌쩍 뛰어 넘었다. 우리는 우와하는 함성소리와 기립 박수를 보내며 기막힌 쇼를 보여준 양에 대한 보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