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전 정보통신 감리의 경력 인정 범위에 궁금한 것이 있어 전직장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 대부분의 통화를 하였다. 그러면서 통화 내용이 끝나 사무실로 돌아 왔다. 하지만 상대방이 몇마디의 말을 더 걸어와 통화를 몇분 정도 더 했다. 그러고 나서 물을 마시러 정수기로 가니 통신 감리가 한다는 말이 전화 통화를 하려면 밖에 나가서 해야 하지 않냐고 하더라. 그냥 그렇게 그런 사람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 갈수도 있었지만 그가 무척이나 괘씸하다. 뻔히 다른 사람들은 점심시간에도 전화를 하는 경우를 여러번 봤는데 유독 나한테만 이상한 말을 하다니 이사람이 정말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게 아닌지 그러지 않아도 근무시간에 몇마디 사담 했다고 말도 못하게 하면서 본인들은 대판 떠드는 인간들도 있는데 왜 그런 인간들에게는 말한마다 못하면서 애먼사람한테 시시콜콜 간섭을 하려 드는 걸까.. 그렇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고 싶으면 사무실 모든 사람들한테 공평하게 하던지 아니면 하지 말던지 성격이 문안해 보이는 사람한테만 쓴소리를 하고 강성인 사람들 한테는 아무소리도 못하는건지 계속 뒤에서 중중거리는 통신감리에게 왜 사무실이 감옥인가 말도 못하게 하시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니 속이 좀 풀리는듯 싶다.
초심자에게 운좋게도 원하던 일자리가 생겼다. 설비중심의 일자리에서 실망감을 많이 느끼고 있던차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희망의 빵빠레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일은 그리 환상적이거나 긍지감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가지 부조리한 느낌이 많이 들고 직원간 불화에 아무것도 아닌것들로 인한 차별이 만연한 세계였다. 그래도 나이먹고 이만한 일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라 생각하고 3년여를 굳세게 버텨 왔다. 그러나 이도 결국 끝에 다다르고 있다. 처음 생각으론 천신만고 끝에 실낟같은 경력을 만들었으니 그다음은 탄탄대로는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포장이 된길을 걸어갈수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그렇게 희망을 품었겄만 그길의 끝은 경제의 불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안개낀 무인지경의 또다른 이( 異)세계일 뿐이었다.
어쩔수 없이 설비 분야로 되돌아 가야 하나 그리간다고 한들 만만한 일자리가 남아있을지도 의구심이 든다. 어떻게 인생의 길은 이리도 가도가도 파고가 높음을 실감해야만 할까 그길의 끝에서 또다른 희망의 싹은 영영 볼수 없는 것인가
태안으로 고구마를 캐러가서 힘든일만 있었던건 아니다. 물론 농사일을 하다 가니 흙이 묻어 엉망이 차림으로 가긴 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만의 맛집이라고 하니 기대가 만빵이다. 만리포를 지나 천리포로 들어서 현대식 건물에 천리카페라고 쓴곳으로 들어서니 1층은 식당이고 2층은 카페라고 한다.
짜글이라는 이름에서 소금이 많이 들어갈거 같은데 국물없이 아나고만 먹으니 슴슴하니 먹을만 했다.
그리고 2층카페로 가 커피한잔하면서 천리포 닭섬이 보이고 그아래 모래사변에는 텐트족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있다.
그중에서도 거대한 텐트를 혼자 힘들게 세우던 딸둘의 아빠가 기억에 남는다. 몇번가다 힘들면 다시는 캠핑 안가려고 할듯 싶다. 그리고 그옆 도로에는 수즈키등 일본 오토바이들이 줄을 서있다. 아...한번 타보고 싶다.
저녁에는 만리포의 선창횟집으로 가서 신선한 회를 먹으며 만리포 해변의 을긋블긋한 네온사인을 보니 만 하루가 지났음에도 몇일을 보낸듯 싶다.
태안에 와서 고구마 캐기 체험도 하고 맛난것도 먹고 실패했지만 해루질도 해보고 멋진 야경도 보니 이게 인생사는 맛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특정 분야는 자격증 따서 진입을 해보면 그안의 허들은 아주 가관이다. 초급, 중급, 고급의 의미없는 구분에 기술사를 따야지만 준다는 특급이라는 것이 있다. 기술사가 아닌데 특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전에 경력만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감리로 취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특급 아니면 가서 시다 역할만 하는것이지 무슨 보람을 느낀다거나 하는건 없어 허전맘이 들때가 많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또다른 허들이 있는데 그건 PQ 점수다. 아파트공사에 참여를 해야만 100% 인정을 받을수 있다고 하니 이점수를 채우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이번에 통신감리의 특급자격이 자격증에 경력을 추가해서도 가능해 진다고 하여 해보려고 하는데 이는 꼭 이분야를 해본다기 보다도 특급이라는거에 설움이 많아서 그냥 혹해서 발급 받아 보려고 하는맘이 더 클것이다. 그래서 같이 근무하는 통신감리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고 하니 그분이 아주 냉소적으로 그냥 전기를 하지 뭐하러 경기가 죽어 현장이 없는데 초보감리를 누가 쓴다고 통신을 하려고 하냐고 사람 기를 꺽는 소리를 해대더라. 여기서 인간성을 볼수 있는데 사람이 도전해 본다는데 그냥 응원을 해줄수는 없는것일까. 물론 건설 경기가 하강 국면이고 통신 특급감리 자격자가 많아지면 기존기술자들이 불안에 떨수밖에 없는 바는 충분히 공감은 가지만 그분의 말이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맘으로 하는 말이 아니길 바라본다.
친척중에 태안에서 고구마를 심는다고 했다. 6월에 내려가 고구마순을 심고 올라왔다. 그런지 4개월후 고구마를 캘거니 내려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기계로 캘거라 힘안들고 거저 줍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호기심에 주말에 내려갔다.
고랑이 5줄이지만 길이가 길어 꽤 많은 편이다. 긴밭 초입에 금요일에 내린 비로 물이 고여 있다. 뿌리채소 수확용인라는 도구를 단 경운기가 도착해서 밭으로 들어 가는데 바퀴가 빠지고 만다. 실갱이를 여러차례 했지만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농사짓는 주인이 집으로 삽을 가지러 간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호미와 삽으로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2고랑 정도 허리아프도록 캤는데 작년에 비해 수확량이 못미친다고 했다.
겨우겨우 경운기가 밭으로 들어와 힘들게 지나간 자리는 순을 들어올리면 그냥 고구마가 그대로 딸려 올라온다. 고구마 캐기가 훨 수월해졌다. 캔 고구마를 큰것과 작은것으로 구분해 자루별로 10kg 씩 나눠 담았다. 온몸의 근육통으로 힘든 하루 였지만 좋은 사람들과 만리포, 천리포의 맛집도 가고 하니 이보다 좋치 않을수 없다.
수원시에서 시행하는 탑동시민농장에서 텃밭을 하며 22년에 이어 24년 올해도 고구마 농사에 실패 했다. 22년에는 한고랑을 캤는데 거의 고구마가 나오지 않았고 그때는 순이 성하면 고구마가 안지 않는다는걸 처음듣고 그런가 하면서 대책없이 당했지만 24년 올해도 마찮가지로 별소득 없는 고구마 농사는 참 어이 없다.
22년 고구마순이 성한 텃밭
5월달에 고구마 순을 사서 심었으나 추운 날씨와 가뭄으로 3번에 걸쳐 추가 식재를 해야 했다. 그리고 10월 중순 6고랑을 캐봤으니 고구마가 아예 없는 줄기가 대부분인다.
24년 고구마 수확분
이래서는 아기들 고구마 캐기 체험은 어려울듯 싶다. 3고랑을 남겨 놨으나 별 소용 없을것 같아 캔자리에 임시고랑을 하나 만들고 그곳에 고구마를 몇개 묻고 아기들이 캐는 체험을 할수 밖에 없겠다. 만약에 내년에도 체험텃밭을 할수 있다면 고구마를 올해의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 잘 지을수 있겠다 싶다. 우선 고구마 식재를 5월 초보다는 온도가 올라가는 5월 말에서 6월 초에 심고 식재한후 일주일 동안은 계속해서 물을 공급해 줄예정이다. 또한 고구마 줄기가 성해지는 7월과 8월 경에는 바닷물을 민물과 1대2의 비율을 섞여 일주일 간격으로 3차례 잎에 뿌려주어 영양성장에서 생식성장을 할수 있게 해볼 예정이다. 그리고 고구마를 심을 텃밭에는 봄초에 아예 거름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처음 개간한 토지가 아니고 지속적으로 텃밭으로 사용된곳은 전해에 그곳에 누가 무엇을 농사 지었고 거름을 얼만큼 줬는지 알수 없으니 과도한 거름은 고구마 농사를 망치는 지름길일 것이다. 내년에 텃밭을 다시 할수 있다면 올해처럼 처참한 고구마 수확 성적표를 받아 들지는 않아야 겠다.
무료한 주말에 누군가 틀어버린 넷플릭스에서 전란이란 한국영화를 보았다. 극장판인줄 알았는데 집에서 볼수있어 아주 편하게 관람을 하였는데 영화 자체는 검술 액션을 보면서 스토리도 어느정도 고구마를 먹지 않아도 돼니 괜찮았는데 짜증스런면이 있다고 하면 그건 권련있는 자들이다. 우선은 박정민의 아버지라는 작자 말이다. 대리시험으로 무과 장원을 해줬으면 약속대로 노비에서 해방 시켜줘야 함에도 그 약조를 헌신짝처럼 가져다 버려 버리니 에휴... 하긴 강동원이 맴이 변해 자신이 대리시험 치렀다고 떠들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것이 두려웠을거 같긴 하다. 또한사람은 선조다. 이 인간은 백성 내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몰래 도망까지 친인간이 돌아와서 한다는 짓이 전란으로 한것 힘든 백성들의 처지를 돌보지는 못할망정 자신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는 핑계로 궁궐부터 어마어마하게 재건 하라고 압박을 하니 우째 이런 사람이 한나라의 왕이란 말인가 마지막에 감독이 선조를 엿먹이는 장면이 있어 통쾌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조선 백성의 고통의 산물이었으니...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 비열한 선조역활의 차승원 말이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건지 영화 보는내내 한대 쥐어박고 싶더라
애니메이션 하면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최고로 치는 사람으로서 오래간만에 보게 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만화 영화를 볼라치면 마음속 깊은곳 부터 설레임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은퇴를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는것 뿐이다. 그의 작품답게 이번에도 주인공 아버지가 군수공장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은 전쟁통에 화마로 어머니를 잃고 외가집으로 옮겨 간다. 여기서 한국사람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처재와 재혼을 한다는 점이다. 유교에 찌든 사람이 아니라도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내용이다. 우씨왕후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취수혼을 하는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기까지는 멋진 배경에 따른 호기심으로 시청을 할수 있다. 문제는 이후부터다. 역시나 이상한 건물이 나오고 왜가리가 말을 하면서 부터 이해불가 난공불락의 스토리가 이어진다.
소년과 왜가리
갑자기 새엄마 즉 이모가 실종되고 주인공은 왜가리에 끌려 이세계로 들어선다. 센과 치히로에서의 검댕 처럼 와라와라가 나오고 그걸 잡아 먹는 펠리칸이 나온다 그러더니 배를 타고 큰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 나오고 사람 잡아 먹는 앵무라니... 또한 어린엄마가 나타나고 오래전에 실종됐다고 하는 증조부가 나와 주인공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계다는 말을 한다. 난 지금도 이게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다. 아무리 편집은 자유분방하고 구성이 산만하고 난해하다 해도 도대체 무얼 말하자는건지 모르겠다. 집사람 말대로 그냥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장가를 가는데 대한 어린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 정도로 치부하면 되는건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다고 할정도면 그림이 예쁜거 말고 그냥 대단하다 심오하다로 넘어가기에는 나로서는 정말 어렵고 어려워 수박 겉핡기를 할수 밖에 없다고 해야겠다. 제목도 미국판의 소년과 왜가리가 더 산뜻하지 않을까 한다.
*유투브를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를 관통하는 명쾌한 통찰력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대단한 분들이 계시던데 만화영화 한편을 보면서
신라시대 문무왕때 당성백, 효소왕때 당성후를 지냈으며, 그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남양으로 정한 남양홍씨들에 의해 흙을 쌓아 축성된 산성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 시대 때 당항성으로 지칭되었다. "당성"이란 명칭은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면서, 남진 정책으로 화성 일대가 고구려에 속하면서 당성군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51년에 신라 시대 진흥왕이 757년에 '당은군'으로, 829년에 군사적 거점으로 '당성진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삼국통일 전쟁기와 통일신라 시대에 당성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항성은 신라가 선진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는 결정적인 문화의 창구 기능을 하게 되며, 신라가 막대한 군사적 비용과 백제와의 맹약을 깨뜨리면서 이곳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라가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이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 할 정도로 삼국시대 역사의 무대에서 당항성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무역항인 당항성을 통해 드나들었던 선진문물 중에서 당의 불교 문화는 중요한 전래요소다.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당성은 1,993년에 지표 조사가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1,998년과 2,000년에 2차에 걸쳐 발굴 조사로 화성 당성이 1차 성과 2차 성의 복합 산성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의 1차 산성은 산이 정상을 중심으로 쌓는 태뫼식 산성이고, 통일신라 시대 에 축조된 2차 성은 계곡부를 포함하여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지금까지 6 차에 걸친 발굴을 통해 당성에서는 명문 기와, 토 제만등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당성 발굴은 지금도 진행 중이 며,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로 보자면, 당항성은 화성시 남양에 있는 당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현재 남양에 있는 당성은 바로 당항성 내의 군사적 보호 시설로서 축조된 성이 틀림없다. 현재는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 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 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 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현재는 화성시에 속하지만,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백제 시대 당항성에서 현재 화성 당성으로 25회나 바뀌었다. ※(당성→화성 당성) 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종목 : 국가사적 문화재 217호[당성 및 사적비] 지정되어있다.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 국방 / 성 / 성곽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삼만리 산32번지. 출처 : 한국민속문화 대백과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성시 "남양, 당성의 유래 한국 문화유산청 홈페이지 참조.
남양홍씨 본관은 옛 수원화성 남양 (현재 화성시 남양읍) 고구려 27대 영류왕 (재위 618-642)이 당나라에 공자 맹자와 같은 훌륭한 덕예 문학의 선비파견 요청함에, 당나라 태종께서 문화 사절 당 학사 8명을 파견했는 데, 그중에 한 분이 선 시조 홍천하(洪天河)님이시다.
STB 상생방송 참조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인간과 사회의 심리, 도덕, 정의를 논하는 학문으 로 유교보다는 넓은 범의) 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하며 정착한 곳이 당성(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사적 217호) 이다. 그 후 연개소문의 난을 당하여 신라국 지리산 덕산동으로 피신하여 신라 선덕 여왕 때 홍 학사는 유학발전에 큰 공을 세워 조정에서 큰 덕으로 덕산 촌주에 명하고 국사로 예우했다. 문무 왕 때 당성 백에 봉 해지고, 신무왕 때 태자태사로 추대했으며, 효소왕은 당성 후로 삼았다. 그 후 당성이 남양으로 개칭되니 후손들이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번성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당성 홍 씨는 신라 귀족의 반열에 서서 문무 을 깨우치며 풍속을 다스리는 지도계급으로 존경을 받아왔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양 유생통문 이라는 글을 보면 "신라오주가 학사 공을 스승으 로 받들고 교화를 보급한지 50여년 만에 정교는 성행하고 후학은 대통하 였다. 김유신 임강수 설총 김총수 등이 선생의 후학들이며 공자묘를 창설 하였다"고 하였으며, 목은 이색은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예악, 시, 서 (예법과 음악, 시와 글씨)의 발전으로 많은 군자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공자라 할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십재명벌로 손꼽혔다. [남양대보(南陽大譜), 한국씨족연구회 참조]